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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고려대학교 민사법학회 학회지 탑되리 격려사 (2003년)

격 려 사 - 관습에 대한 재인식을 통한 온당한 해결책을 위한 제안 - 명 순 구(민사법학회 지도교수)

가지런히 정렬된 은행나무 가로수. 그 나무 밑에 소복이 쌓여있는 노란 은행잎의 오솔길이 저 멀리까지 계속되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같은 모양과 같은 색깔을 가진 것들끼리 잘 어울려 만들어 낸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민사법학회 또한 무언가 유사성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낸 민사법학회의 학회지 ‘탑되리’가 아홉 번째 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요즘에 때때로 합리적(rational)이라는 것과 온당한(reasonable) 것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합니다. 법적 분쟁이 벌어진 경우에 그에 대한 법적 해결책은 ‘온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분쟁관계의 당사자가 모두 승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대부분의 경우에는 ‘합리적’인 것이 동시에 온당한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인지, 모든 경우에 있어서 끝까지 온당함을 추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에는 그 해결책이 합리적이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마는 경우도 있는 듯 합니다. 합리성이 온당성을 완전하게 담보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합리성에 만족하는 태도를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법률가가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法源(source of law)에 의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受範者에게 豫見可能性을 부여함으로써 법적 안정성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法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法源에는 국가의 제도적 기관을 통하여 實定化된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하면서도 사회구성원 사이에서 강한 규범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慣習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정법이 대체로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관습은 당해 관습의 효력범위 내에 있는 당사자들 간에 온당한 것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규율의 필요성이 있는 모든 것을 실정법으로 규율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설령 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경제성이 없는 일입니다. 관습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나라의 실정법도 관습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법의 일반법인 민법 제1조에서는 “민사에 관하여 법률에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상법 제1조는 “상사에 관하여 본법에 규정이 없으면 상관습법에 의하고 상관습법이 없으면 민법의 규정에 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관습에 대한 탐구의 중요성은 프랑스의 法史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프랑스민법전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전개된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합리적인 관념만이 아니라 프랑스의 관습을 굴절없이 반영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입법자의 노력이 오늘날 프랑스민법전이 있게 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구한말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조선과 만주를 삼키기 위하여 사전에 각 지역의 관습을 조사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덕택에 그들은 상당한 기간동안 이기적인 방법으로 국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관습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동안 우리는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지 반성해 봅니다. 법률분쟁에 대한 온당한 해결책을 위한 방법의 하나로 관습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거래현실은 참으로 많은 변천을 거듭해왔고 지금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극히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금융의 문제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금융자본주의’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현대 거래에서 금융제도가 미치는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금융시장과 금융거래 등의 영역에서 우리의 실정법이 규율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이미 영미법적인 제도와 법기술에 토대를 둔 거래현실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실정법과 상치되는 거래현실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私法體系는 영미법계가 아닌 대륙법계이니 하는 등의 설명은 이제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한 추상적인 논의에 눌러앉아 있을 때가 아닌 것입니다. 거래관습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금년에 민사법학회에서는 영미의 계약법에 대하여 탐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미나에 참석하는 회원들이 대부분 저학년이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았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준비하는 법학도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지적 호기심을 승화시킨 태도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탑되리’ 제9호의 발간을 축하하며 민사법학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따스하고 애정어린 격려를 보냅니다.

2003.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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