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도시의 감나무에서 紅枾를 본다는 것
도시의 감나무에서 紅枾를 본다는 것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우리 눈에 보이는 풀과 나무는 모두 가을의 모습과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요즈음 도시의 공원이나 가로에는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감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감나무는 열대·아열대 및 온대 지방에 매우 넓게 분포하는 식물로 그 종류가 거의 200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 분포된 감나무는 이용 가치가 거의 없고 과실로서 재배 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가 한국·중국·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란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로 감나무를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 같다. 감나무는 일곱 가지 덕이 있다 하여 예전부터 예찬을 받아온 나무이다. 일곱 가지 덕이란 이런 것이다. 수명이 길고, 그늘이 짙으며,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 벌레가 생기지 않으며, 가을에 단풍이 아름답고, 열매가 맛이 있으며, 낙엽이 훌륭한 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감나무는 文·武·忠·節·孝의 다섯 덕목을 갖춘 나무로 칭송의 대상이 되어왔다. 잎이 넓어서 글씨 연습을 하기에 좋다는 이유에서 文이 있고,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쓰인다는 이유에서 武가 있으며, 열매의 겉과 속이 같은 색으로 표리가 동일하므로 忠이 있고,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열매가 가지에 달려 있으므로 節이 있고, 치아가 없는 노인도 홍시를 먹을 수 있어서 孝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감나무는 黑·靑·黃·紅·白의 五色을 갖춘 나무로 예찬받기도 한다. 나무 심재는 까맣고, 잎은 푸르며, 꽃은 노랗고, 열매는 붉으며, 곶감에서는 하얀 가루가 나온다는 이유이다.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지면 감나무 가지에 감이 흠뻑 익어 紅枾가 된다. 지금과 같은 늦은 가을, 시골 마을에 있는 감나무에는 홍시도 달려있고 홍시로 향하고 있는 감도 달려있다. 그런 감나무 밑에서 친근한 사람과 같이 홍시를 찾아가며 그 맛을 즐기는 모습은 여유롭고 따스하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이와 같은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도시의 감나무에는 감이 전혀 열리지 않기 때문일까? 도시의 감나무에 열린 감은 모두 어느 한 순간에 동시에 홍시로 되기 때문일까? 도시의 감나무 가지에 열린 감은 공해에 찌들어 식용할 수 없기 때문일까? 그 원인은 아주 다른 곳에 있다. 도시의 공원에 가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케 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공원에 온 사람들 중에서는 아직 익지도 않은 감을 따는 사람이 있다. 아주 태연하게 도둑질을 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하여 도시의 감나무에 열린 감은 홍시가 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으며, 그 결과 도시에서는 홍시를 보기가 어렵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도시의 감나무가 오로지 홍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홍시를 볼 수 없다고 하여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도시의 감나무에서 홍시를 거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이를 그냥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보고자 한다. 첫째, 생명체로서의 감나무를 생각하고자 한다. 감나무는 생명체인데, 생명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모습이 굴절없이 반영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감이 채 익기도 전에 모두 따버리는 행위는 감나무가 자신의 생명력을 한껏 발휘하여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생명체에게 생명체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또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둘째, 감이 채 익기도 전에 따는 행위 자체의 非道德性을 생각하고자 한다. 자기의 것이 아닌 감나무에서 무단으로 감을 따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감이 익도록 놓아두었다가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 그 달콤한 감이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감을 땄다면 이는 더 나쁜 행위이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라는 못된 심보와 다를 것이 없는 행동인 것이다. 도시의 감나무에서도 紅枾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 되기 위해서는 생명체들끼리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굳은 의지와 여유도 필요할 것이다.
<2002월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