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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주례선생님’ 데뷰 스케치

‘주례선생님’ 데뷰 스케치 명순구(明淳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약 4년 전의 일이다. 한 제자와 다른 일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얼마 후에 결혼을 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결혼소식만을 간단히 말했을 뿐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가 주례를 부탁하면 어떻게 하지?” 내 고민의 핵심은 당시 마흔 살에 불과한 나의 연령이었다. 생각해 보니 혼자 끙끙댈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 학과에서 연배가 가장 높은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였다. 그 분은 “나는 20대에 친구의 주례를 했는걸!”이라는 말씀으로 나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주셨다. 그 이후로 나는 만약 그가 주례를 부탁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시원하게 수락하기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날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주례선생님’으로 데뷰하였다. 결혼식장에서 나는 송구스럽게도 수많은 인생의 선배들 앞에서 주례사를 하였다. 그것이 몇 년 전 이맘 때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온 세상이 생명의 꿈틀거림으로 가득합니다. 나무들은 겨우내 생명의 단서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봄이면 이렇게 생명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푸른 잎을 내는 것은 자신의 생명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며 기쁨을 느낍니다. 여기 이와 비슷한 모습이 오늘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군과 ○양이 서로 사랑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데 그것이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요? 두 사람의 모습이 요즘의 자연을 닮았습니다. · · · · · · · · · · · · · · · · · · · (중략) · · · · · · · · · · · · · · · · · · · · · · · · “여러분! 저는 오늘 저의 경험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신랑, 신부 그리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결혼의 의미에 대하여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약 5년 전의 어느 봄날, 어떤 제자가 아담한 선인장 화분을 선물했습니다. 조그만 몸집에도 불구하고 그 선인장에는 작고 귀엽게 생긴 새빨간 꽃 두 개가 피어있었습니다. “이렇게 조그만 선인장도 꽃을 피울 수 있구나!” 하는 약간의 놀라움과 더불어 저는 그 선인장과 학교 연구실에서 동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선인장에 달린 꽃에는 약간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처음의 모습과 비교하여 조금의 변화도 없이 더 활짝 피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들지도 않는 일관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생명의 모습은 참으로 多樣多岐한 것인데, 이러한 종류의 선인장은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변함없는 모습에서 君子의 지조를 떠올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건강했던 선인장이 말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선인장은 물을 자주 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핑계로 너무 오랫동안 팽개쳐두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부랴부랴 물을 주어 보았습니다. 매일매일 눈길을 주면서 다시 생생하게 살아달라고 애원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선인장은 끝내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몸통이 그렇게 말라버렸는데도 빨간 꽃은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라죽은 몸통에 붙은 꽃이 생생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 꽃의 끝을 잡고 당겨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그 빨간 꽃은 生花가 아닌 造花였습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결혼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물을 주지 않아 선인장을 말라버리도록 방치한 대목입니다. 부부는 서로에 대하여 넓은 이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해심의 깊이에 있어서 부부간에 차이가 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어떤 집은 남편이, 또 어떤 집은 아내가 더 깊은 이해심을 보이며 살아갑니다. 더 깊은 이해심을 가진 쪽은 상대방에게 “이것을 해 달라! 저것을 해 달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치 선인장이 매일 물을 달라고 조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매일 조르는 것은 아니지만 선인장도 물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으면 말라죽게 됩니다. 매일같이 물을 주는 것은 단순한 습관만으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한 번씩 때를 맞추어 물을 주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상대방의 깊은 이해심으로 혜택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배우자는 선인장의 교훈을 마음속에 새기기 바랍니다.” “둘째는, 선인장에 있던 꽃에 관한 것입니다. 선인장의 꽃을 生花라고 믿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인 즉, 그 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선인장의 몸통에 달려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인장의 몸통이 말라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生花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인장의 몸통은 造花에 불과한 꽃에 생명의 모습을 불어넣을 정도로 대단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夫婦도 그런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생기를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신랑 ○군과 신부 ○양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하여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 조차도 가지지 못한 이웃은 없는지 살필 줄 아는 아름다운 엘리트의 모습으로 살아주기를 당부합니다.” · · · · · · · · · · · · · · · · · · · · · (후략) · · · · · · · · · · · · · · · · · · · · · · 인생의 선배들 앞에서 송구스런 마음으로 행한 서툰 주례사에 대하여 그들은 따스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주례선생님’으로 힘겹게 데뷰하던 인생후배에게 그렇게 넓은 아량을 보여주었다. 청중들은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것이지 주례사를 듣고자 온 것이 아니었고, 나도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주례사를 했다. 잔치마당에서 서로의 역할은 달랐으나 마음은 하나였다. 그래서 그 곳에는 평화가 있었다. [2006.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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