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서언] 민법총칙,법문사, 2005

August 11, 2005

머 리 말



  고려대학교에서 민법 강의를 시작한 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입니다. 그동안 학생들로부터 제 강의안이 교과서의 모습으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습니다. 필기의 부담을 덜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인데 저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저의 게으름에 있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강의안의 상당부분을 매 학기마다 수정해 왔던 저의 경험 또한 교과서 출간 결심을 주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망설임의 시간을 계속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과서라는 것이 학문 매체의 하나로서 유용한 것이라는 생각, 학교의 수강생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에게도 저의 학문적 견해를 표시함으로써 제 자신을 좀 더 세련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이러한 것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각이 그간의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도록 도와주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주 조심스럽게 전통적인 형식의 교과서를 세상에 내놓기로 마음먹었고 민법총칙 분야를 그 출발로 삼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민법학을 하는 것이 새끼를 꼬는 일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새끼줄은 얼핏 보기에는 이음매가 없이 통째로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따로 떨어져 있는 여러 개의 볏짚을 이어놓은 것입니다. 전혀 다른 품종의 쌀을 생산한 볏짚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새끼줄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민법은 어떠합니까? 민법은 여러 가지 개별규범으로 구성된 하나의 큰 체계입니다. 그런데 통째로 하나인 체계가 아니라 개별규범의 수에 상응하는 만큼의 이음매가 있는 체계라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민법체계를 구성하는 개별규범 중에는 매우 이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 다른 개별규범과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볏짚을 이어 만든 새끼가 어마어마한 힘을 지탱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잘 정비된 민법체계는 사회의 민사관계를 타당하게 규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별규범이 민법의 체계 속에서 그렇게 어우러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기보다는 체계화를 위한 의지적 노력의 결과라는 점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 민법학도 이제 괄목한 만한 성장을 하였습니다. 모두 先學들의 공로입니다. 현재의 우리에게도 후세에 부끄럽지 않을 학문을 하여야 할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三角洲를 생각합니다. 삼각주는 인류에게 크나큰 유용성을 제공해 왔습니다. 그런데 하천의 물살이 어디에서나 같은 속력이라면 삼각주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유속의 감퇴가 있어야만 비로소 삼각주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간 한국의 민법학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숨가쁘게 앞을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도 귀중한 가치가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경우도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장을 향해 앞으로 달려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을 떼어내어 차분하게 숨을 고르면서 調整의 시간을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하천의 유속이 느려지면서 삼각주가 형성되듯 말입니다. 아무런 실익도 없는 학설논쟁을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일, 18세기의 중농주의자(physiocrat)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설파하는 과정에서 암호 같은 언어를 사용했던 것과 같이 비교적 간단한 아이디어를 난해하게 서술하면서 언어의 유희에 빠지는 일, 물건을 자르는 것이 가위의 윗날인지 아랫날인지 하는 식으로 절제되지 않은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일, 법적 문제의 해결을 시도함에 있어서 우리의 경험과 학문적 업적을 살피기도 전에 비교법이라는 미명 아래 성급하게 외국법으로 눈을 돌리는 일··· 이제는 이런 것들과 단호하게 이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法學을 함에 있어서 論理的 思考가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나 법학은 論理學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익의 충돌을 조정하는 것이 法일진대 어떻게 논리만을 가지고 법적 해결책을 고안해낼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한 법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하여 논리를 포기하여야 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또한 법학을 함에 있어서 理念的 思考가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나 법학은 神學이 아닙니다. 현실적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것이 법률분쟁인데 만약 하나의 일관된 이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념에 합치하는 것일 뿐 온당한 해결책과는 거리가 먼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법학을 하는 사람은 理念의 多元性에 익숙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법학을 하는 사람들은 문제해결을 위한 작업에 달려들기에 앞서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여야 합니다. 비록 이러한 변수들로 인하여 자신이 조심스럽게 고안해 놓은 우아한 이론모형의 모양이 찌그러진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앞의 이야기는 제가 민법을 연구하면서 평소에 느꼈던 것들인데, 이 책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마음에서 말을 하다 보니 다소 길어진 느낌입니다. 이 책은 개별적인 사항을 장황하게 나열하기보다는 민법에 대한 원리적 이해를 돕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 책을 읽고 독자들이 민법을 더 탐구할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저의 일차적 목표는 일단 달성된 것입니다.
  민법을 공부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민법총칙 편입니다. 그런데 민법총칙을 잘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규정이 많은데다가 민법의 후속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법학 초심자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민법총칙을 공부하면서 좌절을 맞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그러한 사정을 깊이 참작하여 고비마다 초심자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문체와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 가능하면 일상적으로 많이 쓰여 익숙한 쪽을 선택했다든가, 생소한 개념에 대해서는 각주를 활용하여 쉽게 설명을 했다든가, 상호참조주를 활용하여 책의 앞뒤의 설명을 연결시켰다든가, 관계된 장소에 ‘사례연구’ 또는 ‘보충학습’ 난을 배치한 것 등이 그러한 노력의 흔적입니다. 
  이 책이 법학의 초심자만을 대상으로 기획된 것은 아닙니다. 종래의 通說과 判例理論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새로운 학설제안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시한 비판과 새로운 제안들 중 어떤 것은 타당한 것도 있을 것이지만, 어떤 것은 제 자신의 淺學의 결과에 불과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 선생님들의 애정어린 비판을 겸허하게 수렴하여 저의 학문적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분들의 가르침과 도움 그리고 격려가 있었습니다. 
  우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를 학문의 길로 인도해 주신 崔達坤 선생님(고려대학교 명예교수)과 프랑스의 쟈끄 게스뗑(Jacques GHESTIN) 선생님(Université de Paris I: Panthéon-Sorbonne 명예교수), 두 은사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같은 학교에서 때로는 인생의 조언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학문적 동지의 모습으로 제게 늘 넉넉한 울타리가 되어주시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의 민법 교수님이신, 河京孝 선생님, 申榮鎬 선생님, 安法榮 선생님, 金濟完 선생님, 金基昌 선생님, 金奎完 선생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이 책의 초고를 대상으로 한 교정작업에 참여하여 수고해 준 김종운 군, 오영걸 군, 장진성 군, 황인준 군, 서정래 군, 박찬호 군, 이아람 양에 대해서도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위 제자들 모두 學界 또는 實務界에서 훌륭한 재목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습니다. 책표지의 디자인을 위하여 정성을 다한 주식회사 바이널의 이서현 양과 이 책의 출판을 맡아주신 법문사의 관계자 여러분들의 수고도 기억하고 싶습니다. 또한 헌신적인 마음으로 가정을 경영하면서 늘 든든한 후원을 보내 주는 아내 朴奎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어린 아이의 모습을 뒤로 하고 성장하고 있는 아들 柱賢은 바르고 현명한 청년, 가족과 이웃에게 희망과 행복을 나누어줄 수 있는 청년으로 커나가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학문생활이 최선의 길인지 아직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에 대해서는 아직 희미하나마 확신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있습니다. 학문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학문을 함에 있어서도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 학문을 하는 사람은 현실에 발을 담근 채 한 손에는 先學의 생각이 담긴 책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필기구를 챙기고 있어야 한다는 것··· 요즘에는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많이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 민법학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요인이 발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제게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2005년 8월 11일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연구실에서
明 淳 龜(MYOUNG Soon-Koo)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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