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法治'와 '法恥'의 사이[V. 2]
'法治'와 '法恥'의 사이[V. 2]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Y는 1950년 초 국무총리 비서관으로 본격적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는 정치인이었다. 그는 권위주의적 군부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용감한 민주화투쟁으로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람이다. 1990년에 Y는 그의 투쟁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시민의 적으로 평가되는 집단과 굳게 손을 잡았고, 이를 기반으로 마침내 1992년에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Y의 아들 H는 Y의 대통령 재임시부터 구설수에 오르내리더니 Y의 임기 말에는 사법처리를 받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의 아들이 감옥에서 생활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997년 Y의 뒤를 이어 D가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98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Y는 D와 오랜 동지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라이벌이기도 했다. D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감옥에 있는 Y의 아들을 풀어주느니 마느니 하는 논쟁이 일기 시작하였다. 1998년 8월 11일자 어느 일간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H씨 사면說 일축 ○○○청와대대변인은 11일 ○○○전대통령 차남 H씨에 대한 사면검토설에 대해 "처음부터 검토한 적이 없다"고 공식 부인했다. ○○○대변인은 "H씨는 현재 대법원 상고중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사면이 불가능하다"며 "어떤 개인의 생각일지는 모르나 구체적으로 검토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Y의 아들 H씨에 대한 사면에 대한 청와대 ○○○대변인의 말, 특히 그에 대한 사면이 법적 장애를 가진 것이라는 사실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나자 H씨의 사면에 관한 소문은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1999년 8월 13일자 한 일간지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법무부, 2천8백64명 8·15 특사 발표 법무부는 8·15 광복절을 맞아 ○○○전대통령의 차남 H씨와 시국 공안 노동사범 및 모범수 등 2864명을 특별사면 복권 및 가석방한다고 13일 발표했다. 이번 조치로 복역 중인 기결수 1742명이 15일 풀려나고 공안 노동사건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1112명은 복권돼 피선거권 등 공민권을 회복하게 됐다. 행형성적이 우수한 사형수 5명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는 등 7명이 감형처분을 받았다. 사형수에 대한 감형조치는 87년 이후 처음이다. H씨의 석방과 관련하여 청와대는 결국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정부의 공식발표가 있기 전에 H씨를 풀어주는 문제를 놓고 이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청와대가 그러한 조치를 취한 배경과 관련하여 1999년 8월 12일자의 한 일간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H씨 잔형면제 의미] 여론 - 정치적 계산 '절충수' H씨에 대해 취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진 잔형집행면제 조치는 여론과 정치적 계산 사이에서 나온 '절충수'로 보인다. 법조인들은 H씨가 지난달 26일 대법원 재상고를 취하하기 이전에 정권 핵심부와 김씨 사이에 사면에 관한 사전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변호사는 "실형복역을 피하기 위해 상고와 재상고를 해가며 2년 넘게 법정투쟁을 벌였던 H씨가 아무런 보장도 없이 재상고를 포기했겠느냐"고 말했다. 검찰이 H씨의 형 확정 이후 이례적으로 그에 대한 소환과 재수감을 미뤄온 점도 사전교감을 짐작케 하는 근거다. 검찰이 H씨를 사면하려는 청와대의 뜻을 알고 일부러 미적거렸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청와대와 H씨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같은 '밀약'은 여론의 반발과 시민단체의 거센 비판을 받으면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친여 성향의 제2건국위원회까지 나서 H씨 사면을 반대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청와대측은 H씨 사면문제를 재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청와대는 H씨에게 사면을 다음 기회로 미루자는 등의 '양보'를 요구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재상고 취하라는 '외통수'가 이미 던져졌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청와대와 H씨는 '재협상'을 통해 잔형집행면제조치를 선택함으로써 서로 명분과 실리를 나눠 가진 것으로 보인다. 잔형집행면제로 H씨는 재수감을 피할 수 있는 실익을 얻게 됐다. 반면 청와대는 벌금과 추징금을 집행함으로써 최소한의 사법정의를 세운 것으로 '자족'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복권도 유보함으로써 H씨의 숙원으로 알려진 정치활동을 막았다. 그러나 H씨에 대한 이번 조치는 그의 '죄'에 상응하는 실질적인 '벌'을 기대했던 국민여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반발이 적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또 사면의 결과 못지 않게 그 '과정'에 대해서도 비판여론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뜻을 무시한 채 '정치적 거래'를 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 후 H씨는 복권되었다. 2000년 8월 13일 자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4일 8·15 특사 단행…생계형 사범 등 3만 여명 규모 정부는 14일 오전 8·15 광복절 55주년 기념 특별사면을 단행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특사 대상자는 시국 공안사범과 선거사범, 경제사범 및 국제통화기금(IMF)경제난에 따른 생계형 사범, 일반 형사범과 기타 정치인 등 모두 3만 여명이며 14일 오전 국무회의를 통과하는 대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또 지난해 8·15 특사때 잔형집행 면제로 재수감 위기를 넘긴 H씨가 형선고실효를 통해 복권되고 한보그룹 및 청구사건에 연루된 ○○○ 전대통령총무수석비서관과 보광그룹탈세사건의 ○○○ △△일보회장 등도 사면될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8월 14일 자 한 일간지는, 2000년의 8·15 특사 조치에 H씨뿐만 아니라 Y의 대통령 시절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을 지낸 ○○○ 전의원도 포함된 것에 대한 Y측의 반응을 보도하고 있다. [8·15특사] H씨, ○○○씨 사면 상도동 반응 Y 전대통령은 14일 자신의 차남인 H씨와 측근이었던 ○○○전의원이 8·15 특사에 포함된 데 대해 공식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Y 전대통령은 이날 상도동 대변인격인 한나라당 P의원으로부터 H씨와 ○○○전의원의 특사 소식을 전화로 보고 받았으나, "알았다"는 말 이외에는 별다른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P의원이 전했다. 이와 관련, P의원은 "Y 전대통령은 그동안 이 정권에 의해 H씨가 사면·복권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고, ○○○전의원에 대해서도 형평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으며, 이 같은 입장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P의원은 ○○○ 전의원이 형집행 일시정지로 석방된 데 대해서는 "비슷한 혐의로 구속됐던 민주당 K 상임고문은 벌써 풀어주지 않았냐"며 형평성 문제를 거듭 제기하는 등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P의원은 "○○○ 전의원을 사면·복권이 아닌 형집행 일시정지로 풀어준 것은 상도동을 우롱하는 것"이라며 "자기 사람은 진작 풀어주고 상도동측 사람은 형집행 일시정지로 뒤늦게 풀어준 것은 정치보복과 기만"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H씨의 복권과 관련해서도 상도동측은 복권 시점이 늦어진데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P의원도 "상도동측에서는 단 한번도 H씨에 대한 사면복권을 요청한 바 없다", "지금 이 시점에 와서 사면복권이 된들 실익이 없다"는 말로 이 같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앞서 Y 전대통령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현 정권에서 사면·복권을 원하지 않는다", "다음 정권에서는 사면·복권될 것"이라며 H씨의 사면·복권문제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바 있다. 또 Y 전대통령은 지난 12일 P의원으로부터 H씨가 사면·복권 대상자에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를 받고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P의원이 전했다. 1905년 을사년, 국권 잠탈의 모습 앞에서 한 지식인은 '是日也放聲大哭'이라 통탄하였던가? 1999년 광복절의 특별사면, 이에 대하여 청와대는 '20세기 마지막 광복절을 보내며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행해진 것이라 한다. 국권 회복을 기념하는 날에 있었던 사면을 보면서 방정맞게도 구한말 민족암흑기의 탄식이 떠오르는 것은 특정인에 대한 부적절한 사면으로 인하여 이번에는 법치주의가 통곡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제도적 연혁이 어떠하든 간에 국가원수의 사면권도 궁극적으로 헌법질서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H씨에 대한 사면(그것도 '변칙사면')은 사면권의 헌법내재적 한계를 일탈한 사면권 남용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본다. 그에 대한 사면은 일부 집단간의 화합은 될지 모르나 국민대화합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사면을 반대하던 국민의 생각은 단순한 여론이 아니라 바로 사면권의 헌법적 한계라는 점을 인식했어야 한다. 대통령은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 약속보다는 헌법 제69조에 따라 취임선서에서 행한 국민과의 약속에 충실했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발생은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에 대한 견제장치의 제도화를 생각하게 한다. 원천적으로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범죄를 법률로 정하거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면심사위원회'의 사전심의에 따라 사면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에 대하여 사면제도의 경직화 등을 근거로 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사면권 남용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그렇다고 국가원수에게 사면권을 정당하게 행사할 것이라는 내용의 소위 '준법서약서'를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많은 경우에 심각한 사건은 그것이 해결됨으로써 종식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잊혀질 뿐이었다. 이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출현으로 묻혀지지 않을까 두렵다. 그래서는 아닐 되는데 말이다. '法治'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 이 중대한 사태로 인하여 20세기의 마지막 광복절과 21세기의 첫 광복절은 '法恥'의 날로 기억되어야 한다.
<2000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