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거리의 휴지통을 없애면 휴지가 없어지는가?

April 16, 2001

거리의 휴지통을 없애면 휴지가 없어지는가?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예전 국민학교 시절에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로 시작되는 노래를 배운 적이 있다. 이 노래의 제목이 '새 나라의 어린이'이던가? 요즘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이 노래가 있다고 한다. 이 노래는 "게으름뱅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욕심쟁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등을 말하면서 사회생활에 있어서 사람들이 지켜야 할 모종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이 노래에 "휴지 투기꾼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는 표현은 없다. 그러나 이 노래의 전반적 취지로 볼 때, 이 노래에는 "휴지를 함부로 버리지 말자!"라는 규범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노래에서 제시하고 있는 규범은 이를 한정적 열거가 아닌 예시적 열거로 해석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나 휴지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나쁜 일이다. 휴지는 휴지통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서울의 거리에는 휴지통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파트 단지 내에 설치되어 있던 휴지통이 사라졌고, 정류장마다 설치되어 있던 휴지통도 사라진 것이다. 휴지통이 철거된 시점은 1995년 '쓰레기종량제'가 실시된 때 정도로 알고 있다. 

  쓰레기종량제를 시작할 때에는 이런 저런 말도 있었지만 90년대부터 시행된 정책치고는 크게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된다. 쓰레기종량제와 관련하여 1999년 말에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연구원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종량제에 대하여 긍정적 평가에 인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쓰레기종량제 실시 이후 쓰레기 발생 감소량은 1995년 464만4천 톤, 1996년 450만8천 톤, 1997년 554만9천 톤, 1998년 736만4천 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쓰레기 처리비용 절감액도 1995년 3천111억4천만원, 1996년 3천290억8천만원, 1997년 5천271억5천만원, 1998년 8천321억3천만원 등 모두 2조원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와 함께 이 기간에 재활용품도 662만7천 톤에 이르러 8천600억원의 경제적 이익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한다. 게다가 이 연구권이 주부 252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 쓰레기종량제 실시 이후 쥐, 바퀴벌레, 파리 발생도 크게 줄어 들어든 것으로 파악됐다고 한다. 쓰레기종량제는 이미 정착된 제도이고 또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정책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하면서 서울 거리에 있던 휴지통을 모조리 치운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 한 것 같지 않다. 쓰레기통을 치우게 된 경과는 대강 이런 것으로 알고 있다. 쓰레기종량제 실시로부터 얼마 후인 1996년 5월 서울시는 "쓰레기가 휴지통을 넘쳐 오히려 거리를 더럽힌다"는 지적에 따라 종로 일대를 '휴지통 없는 거리'로 시범 지정하였다가 종로와 함께 송파구 백제고분로, 동대문구 왕산로 등도 이에 포함시켰는데, 이러한 경향이 다른 지역에도 별다른 생각 없이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휴지통 없는 거리' 시책을 추진한 이유는 "쓰레기가 휴지통을 넘쳐 오히려 거리를 더럽힌다"는 것이었다. 쓰레기종량제를 시행하고 있는 상태에서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는 휴지통을 그대로 두면 쓰레기 봉투를 사서 버려야 할 쓰레기를 공용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라는 염려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휴지통을 없애버리면 거리의 쓰레기가 없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다. 쓰레기는 버리지 않고 또한 버리는 대로 이를 모두 수거하여야 없어지는 것이지 쓰레기통을 치운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쓰레기 봉투를 구입하여 버려야 할 것을 공용 쓰레기통에 버리는 얄팍한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어디 이런 사람이 그리 많겠는가? 게다가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선량한 시민들은 간단히 버릴 수 있는 휴지를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녀야 하겠는가? 시민의 주머니는 휴지통이 아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배차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버스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다. 담배를 피우다가 기다리던 버스가 오면 담뱃불을 끄고 버스를 타야 하는데, 담배꽁초는 어디에 버린단 말인가? 물론 "담뱃불을 끄고 담배꽁초를 주머니에 넣고 타면 될 것인데,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고 나서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는 쾌감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버스 정류장의 휴지통을 없앤 것은 너무한 일이다. 휴지통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싶은 사람들도 그 정도의 세금은 내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일 같은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대부분 봉급생활자들인데, 사실 우리 나라에서 세금을 정직하게 내는 사람은 이들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생각이 정책입안자에게 반영되었는지 작년 초(2000년 1월 10일)의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2000년 1월 9일 서울시는 종로에 휴지통을 다시 설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당초 휴지통이 없는 거리의 창안 취지와는 달리 시민들이 전화부스, 골목길 등 곳곳에 오물을 버려 거리가 지저분해지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 "여론 조사에서 시민의 80% 가량이 종로에 휴지통을 재설치 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신문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서울시는 종로구청에 휴지통 재설치를 권고할 계획이며, 새로 설치되는 휴지통은 조형물 수준으로 디자인된 휴지통이 될 것이다."

  거리에 휴지통을 다시 설치하기로 한 것은 어쨌든 잘 한 일이다. 그러나 가지 않았어야 될 길을 갔다가 다시 돌아 왔다는 비능률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거리에 있는 휴지통을 없앤다고 해도 휴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부터 할 수는 없었을까? 거리에 있는 휴지통을 없앤 이유 중의 하나가 쓰레기 봉투를 구입하여 버려야 할 것을 공용 쓰레기통에 버리는 얄팍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다면 이러한 지적은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그런 얄팍한 사람이 쓰레기통이 있다고 하여 쓰레기통에 부도덕한 쓰레기를 버리고, 쓰레기통이 없다고 하여 버리지 않겠는가? 오히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쓰레기통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쓰레기를 투척할 것이다. 게다가 쓰레기통이 있을 때에는 그 근처에 쓰레기를 버릴 가능성이 있으나, 쓰레기통을 없애고 나면 아무데나 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청소비용은 청소비용대로 더 소요될 것이다. 또한 부도덕한 사람들의 도덕성은 더욱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쓰레기통이 있을 때에는 "쓰레기는 쓰레기통 근처에 버려야 한다."는 최소한의 도덕성은 인식할 수 있었겠으나 쓰레기통을 없애버리면 그런 인식조차도 없이 쓰레기를 마구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양간이 낡았으면 외양간을 고쳐 소가 안락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일이다. 외양간이 낡았다고 소를 팔아 치우는 것은 다음 해의 농사를 대비하는 현명한 농부의 태도가 아니다. 공중화장실이 더럽다면 깨끗하게 보수하여야 할 일이다. "공중화장실이 더러운 이유는 공중화장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라는 관념으로 공중화장실을 없애고 집에 가서 일을 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급하게 가까운 공중화장실을 찾은 경험이 없는 사람의 생각이다. 급하게 가까운 공중화장실을 찾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슬만 먹고사는 사람이든가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서울 거리에 휴지통을 다시 설치하기로 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게다가 조형물 수준의 휴지통으로 한다니 그것도 좋은 일이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는 예전의 휴지통도 휴지통으로서는 국제적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그 휴지통을 잘 씻어서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굳이 휴지통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아마 예전의 휴지통은 이미 오래 전에 더 큰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요컨대, 거리의 휴지통을 없앤다고 하여 휴지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2001.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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