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까치의 역경: 鵲生流轉
까치의 역경: 鵲生流轉 명순구(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날개길이는 19∼22cm 정도로 까마귀보다 조금 작으나 꼬리가 길어서 까마귀보다 키가 큰 새. 암수가 같은 색깔로 어깨·배·허리는 백색이고 머리에서 등까지는 금속광택이 있는 흑색인 새. 둥지를 중심으로 한 곳에서 사철을 사는 텃새로서, 둥지는 촌락 가까운 큰 나무 위에 마른 가지를 모아 지름 1m 가량의 공 모양으로 지으며, 같은 둥지를 해마다 수리해서 쓰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둥지의 크기를 점점 크게 하는 새. 잡식성으로서 못 먹는 것이 거의 없으며 유라시아대륙 중위도 지대의 전역, 북아프리카 ·북아메리카의 서부 등지에 분포하는 새. 한자어로 '鵲'이라 하는 까치에 대한 설명이다. '三國遺事'에는 계림의 동쪽 아진포에서 까치 소리를 듣고 배에 실려온 궤를 얻게 되어 열어 보았더니 잘 생긴 사내아기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탈해왕이 되었다는 석탈해신화가 실려 있다 한다. '東國歲時記'에는 설날 새벽에 가장 먼저 까치 소리를 들으면 그 해에는 운수대통이라 하여 까치는 吉鳥로 여겨왔다고 적혀있다 한다. 寶壤이 절을 일으키려 북령에 올라가 까치가 땅을 쪼고 있는 것을 보고 내려와 그 곳을 파 보았더니 해묵은 벽돌들이 나왔고, 이것을 모아 절을 세워 鵲岬寺라 이름하였다는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때에 따라 까치는 부처의 뜻을 전하는 전령으로 여겨졌다. 자신을 구렁이로부터 구해준 은혜에 생명을 바쳐 보답한 까치 이야기, 칠월칠석에는 까마귀와 함께 다리를 만들어 연인 사이에 사랑의 다리를 놓아준 烏鵲橋 이야기 또한 까치 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이다. 이와 같이 옛날에 생성된 까치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긍정적인 관점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유난히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을 "아침 까치 같다!"고 한다든가, 허풍을 잘 떨고 흰소리 잘 하는 사람을 "까치 뱃바닥 같다!"고 하는 다소 부정적인 이야기가 있기는 하나 이 정도로 까치의 선행자로서의 그간의 지위를 흔들기에는 역부족이다. 예전에는 감나무마다 몇 개의 감은 까치를 위하여 남겨둘 정도로 까치는 사람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요즘 까치의 사회적 지위는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땅에 떨어진 것 같다. 이와 같은 까치 종족의 신세변화를 우리 인간의 '人生流轉'과 유사하게 '鵲生流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근무하는 고려대학교 캠퍼스에도 상당수의 까치가 서식하고 있다. 제자들과 교정의 벤치에 앉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떤 제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고려대학교에 사는 까치 중에는 날지 못하는 놈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우리 학교에 있는 까치에 무슨 병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돌아온 답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학교의 까치는 매점 쓰레기통에 있는 여러 음식물찌꺼기를 과식하여 비만으로 인하여 날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아직까지 우리 학교에서 날지 못하는 까치를 본 적은 없다. 한 제자의 우스개 소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우리 학교에서 얼쩡거리는 까치를 보면 왠지 다른 까치들보다는 좀 비만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행법상 까치는 유해조수로 분류되어 있다. 유해조수란 인명이나 가축·가금·항공기와 건조물 또는 농업·임업·수산업 등에 피해를 주는 조수로서 환경부장관이 관계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하여 지정·고시하는 조수를 말한다(조수보호및수렵에관한법률 제2조 제2호). 산림청장이 특정 조수를 유해조수로 고시하게 되면 당해 조수를 포획하거나 그 알·새끼 또는 집을 채취하는 것이 허용된다(조수보호및수렵에관한법률 제21조). 1994년 산림청 고시(1994. 6. 11. 산림청고시 제1994-9호)에 따라 까치가 유해조수로 지목되면서 이제 까치는 참새·들고양이 등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으로 포획이 가능한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까치의 신세전락 사실을 알고 나는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까지 까치는 우리나라의 國鳥로 알고 있었는데, 국조를 유해조수로 지정하는 것은 國花인 무궁화를 유해식물로 지정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까치가 농작물에 끼치는 피해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잘못된 처사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 하는 일 중에는 말도 안 되고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많았으므로 이것도 그 중의 하나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다가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까치가 정말로 국조일까?" 사실을 알고 보니 까치는 국조가 아니었다. 1782년 미국은 흰머리수리를 국조로 지정하여 국가상징의 하나로 삼고 있으나,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 새도 국조로 지정한 바가 없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까치를 국조로 오인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한국일보사 과학부는 1964년 10월부터 12월까지 2개월에 걸쳐 영국에 본부를 둔 ICBP(International Council for Bird Preservation: 국제조류보존회의)의 한국본부와 학계의 후원을 얻어 '나라새 뽑기'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전국적인 공개응모에서 총 2만 2780표 중 9373표로 다수표를 차지한 까치가 뽑혔다; 이러한 결정은 ICBP 본부에 보고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까치를 국조로 오인한 것 같다. 까치가 국조가 아닌 것을 확인하고 나니 까치를 유해조수로 지정한 것에 심각한 하자는 없는 것 같아 국가 차원에서는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특별시의 차원에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서울의 캐릭터 왕범이(1998년부터), 서울의 나무 은행나무(1971년부터), 서울의 꽃 개나리(1971년부터)와 더불어 까치는 1971년부터 서울시가 선정한 서울의 새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왕비를 죽이려고 하면 먼저 폐비절차를 밟은 다음에 실행하듯 까치를 죽이려면 까치에게 주어졌던 작위를 모두 폐한 후에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약 40년 전 '나라새 뽑기' 운동에서 학이니 두루미니 따오기니 하는 새들과 경쟁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정도의 입지를 가지고 있던 까치의 위상추락의 근본원인은 그가 인간의 농업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환경부의 조사결과 지난 96년부터 99년까지 까치에 의한 농작물(특히 과일) 피해액이 118억원이라 하니 피해가 적지 않은 것 같다. 피해신고 자체가 귀찮은 많은 농군이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피해액은 118억원을 훨씬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예전의 까치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았는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까치는 과일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까지만 해도 까치는 들과 산에 있는 해충을 잡아먹던 익조였다고 한다. 그러던 까치가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한 것은 까치가 주식으로 삼던 먹이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먹이가 줄어들면서 까치로서는 궁여지책으로 예전 같으면 입에 대기조차 싫어하던 과일을 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까치의 먹이원이 줄어든 원인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독에 있을 것이다. 농작물을 증산하자고 농약을 뿌려 까치의 먹이를 박멸하고 나니 까치로서는 굶주린 사람이 풀뿌리를 씹는 심정으로 과일에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얄밉고, 또 어찌보면 불쌍하기도 한 까치! 이 녀석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사람이 독을 뿌려 농작을 증산하여 그만큼 배가 불러졌으면 그 대가로서 까치의 몫도 인정하는 방향에서 사람으로서는 까치가 과일을 먹는 행위를 용인하여야 할 책무를 부담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을 받아들이자니 농군의 순진한 땀방울이 가슴에 걸린다. 까치를 계속해서 죽여대자니 가련하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경험상 그와 같이 까치를 학대하게 되면 까치로서는 지금보다 훨씬 큰 습격을 가할 것 같은 예감이 스친다. 까치와 사람이 같이 살 수 있는 방도는 없을까? 사실 생태계에서 필요없는 존재는 없다. 특히 까치는 부패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생태계에서 청소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또한 까치의 둥지는 사라져 가는 파랑새와 황조롱이의 둥지로 이용되는데, 파랑새와 황조롱이는 자신의 둥지를 짓지 않고 튼튼하게 지은 까치의 둥지를 이용해 번식하기 때문에 까치가 사라지면 이들 종들도 사라진다고 한다. 세상에 노력하여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데, 잘 생각해 보면 까치와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람으로서야 공부할 수밖에... 융숭하게 대접받던 까치에서 천덕꾸러기로 추락한 까치, 까치의 鵲生流轉. 까치에게 있어서 또 한 번의 鵲生流轉을 기대할 수 있을까? 지금도 창밖 멀리에서는 까치가 짖고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2001.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