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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등나무 씨앗은 아름답습니다

등나무 씨앗은 아름답습니다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작년 늦가을, 몇 몇 제자들과 식사를 함께한 후 학교 학생회관 앞 광장(일명 '로데오거리'라 하든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발 밑에 납작한 콩 같이 생긴 무슨 씨앗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식물의 씨앗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씨앗이 떨어져 있는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등나무가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 곳에 우리가 서 있었습니다. 등나무의 씨앗이었습니다. 같이 있던 제자들과 함께 "아! 등나무 씨앗이 이렇게 생겼구나"하면서 신기해 했습니다. 어떤 제자는 무슨 맛인지 알아보려고 그 씨앗을 까서 입에 대보는 호기심까지 발휘하였습니다. 같이 있던 사람들과 함께 수 개의 씨앗을 주워 그 때 입고 있던 버버리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주머니에 생명의 핵이 있는 것도 모른 채 상당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옷을 갈아 입을 시점에 와서야 주머니에 씨앗이 있는 것을 인식하고 그 날 연구실에 도착하자마자 그 씨앗을 책상 한 구석에 놓아두었습니다. 씨앗의 수는 여섯이었습니다. 씨앗으로서는 그나마 처음으로 빛을 본 셈이지요. 책상 한편에 씨앗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또 무심했습니다. 이렇게 무심하게 또 상당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그 씨앗에 눈길을 맞추어 보니 여섯이었던 씨앗의 수가 네 개로 줄어 있었습니다. 약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연구실 조교에게 씨앗 두 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어있는 화분에 씨앗 두 알을 심었습니다." 본래 그 화분은 난화분으로서 난이 사망한 후 주인공 없는 화분으로 있는 상태였습니다. 주인공 없는 화분에 새 주인공을 설정해 주려는 마음, 씨앗은 책상 위에 있는 것보다는 흙 속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난화분은 흙이 아니라 나무껍질과 돌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씨앗이 싹을 내기에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흙을 사다가 화분을 다시 정리하고, 그 참에 나머지 네 개의 씨앗도 같이 심어 여섯 개 모두 흙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흙을 사면서 화원 주인에게 등나무 씨앗을 화분에 심으면 등나무가 나오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마 나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의 대답이 시원한 것이 아니어서 싹이 나올 것인가에 대하여 확신이 없었습니다. 씨앗을 심은 사실에 대하여 또 무심한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설 연휴를 마치고 연구실에 와서 보니 그간 작기는 하나 뜨거운 혁명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초록의 싹 두 개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 것입니다. 모두 여섯 개 중에서 두 개가 먼저 싹을 낸 것이지요. 아마 화분을 정리하기 전 조교학생이 꽂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 싱싱한 생명의 소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만 전화를 했습니다. 나의 아내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하여 이 사실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실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하고... 무심한 시간 속에서도 남몰래 생명으로서의 의무를 정확히 수행한 등나무 씨앗이 아름답습니다. 생명의 신비로움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싹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네 개도 분명히 머지 않아 싹을 보여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화원 주인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화분에서도 등나무 씨가 싹을 낸다는 사실 말입니다. [200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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