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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라 마르세이예즈'와 '신촌지엔느'

'라 마르세이예즈'와 '신촌지엔느'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I. 이야기를 위한 의미 있는 트집 "나가자! 조국의 아들 딸이여, 영광의 날은 왔도다!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피 묻은 깃발이 날린다. 피 묻은 깃발이 날린다. 보라! 저기 압제자 야비한 무리들의 칼,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아내와 자식을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대오를 지어라!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프랑스의 國歌인 '라 마르세이예즈(La Marseillaise)'의 일부이다. 'La Marseillaise'는 무슨 뜻인가? 프랑스어에서는 지명과 같은 고유명사를 형용사화 하거나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방법으로서 고유명사의 어미에 '-ien', '-ais' 등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수도가 'Paris'인데, 이것을 형용사화 하여 '빠리의'라는 의미를 표현하거나 '빠리 시민'을 지칭하고자 할 때 'Paris'라는 단어 끝에 'ien'을 첨가하여 'Parisien(빠리지엥)'이라고 하거나,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용(Lyon)'의 경우에 '리용의' 또는 '리용 시민'을 가리키기 위하여 'Lyon'에 'ais'를 부가하여 'Lyonnais(리요네)'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한편, 프랑스어에는 각 명사마다 성이 있어 어떤 명사는 남성명사이고, 어떤 명사는 여성명사이다. 'Parisien(빠리지엥)'이라는 단어를 놓고 생각해 보면, 이 단어는 남성형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형용사로 쓰일 때에는 남성명사를 수식하게 되며, '빠리 시민'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빠리 시민 중 특히 남성 시민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단어가 형용사로서 여성명사를 수식하거나 빠리의 여성 시민을 의미할 때에는 'Parisien(빠리지엥)'의 어미에 다시 'ne'가 부가되어 'Parisienne(빠리지엔느)'로 된다. '리용(Lyon)'의 경우에도 이와 유사하여, 'Lyonnais(리요네)'는 남성형이고 이에 대한 여성형은 이 단어의 끝에 'e'를 더하여 'Lyonnaise(리요네즈)'로 변하게 된다. 이 정도면 이제는 프랑스 국가 'La Marseillaise(라 마르세이예즈)'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La'는 여성형 정관사이므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Marseillaise(마르세이예즈)'는 무엇인가? 'Marseillaise(마르세이예즈)'는 빠리에 이은 프랑스 제2의 대도시이면서 지중해에 연한 프랑스 제1의 무역항인 '마르세이유(Marseille)'의 형용사형 내지 마르세이유 시민을 의미하는 여성형 단어이다. '마르세이유(Marseille)'의 형용사형 내지 마르세이유 시민을 의미하는 대표형이 'Marseillais(마르세이예)'인데, 그 끝에 'e'를 붙여 여성형인 'Marseillaise(마르세이예즈)'로 한 것이다. 이런 사정들을 종합해 보여 프랑스 국가인 'La Marseillaise(라 마르세이예즈)'를 직역하면 '마르세이유의 노래'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La Marseillaise(라 마르세이예즈)' 자체의 어구를 장황하게 설명한 것 같다. 프랑스어를 전공하지도 않아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몇 년 전에 들었던 한 백화점의 광고문구가 귀에 거슬렸다는 점에 있다. 서울 신촌에 위치한 그 백화점의 광고문구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백화점은 '신촌지엔느'를 사랑합니다." '신촌지엔느'라는 말은 국어대사전 어디에도 없는 말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우리말로 번역하기 힘든 외국어도 있고, 또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말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국어대사전에 없다고 하여 곧 말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은 너무 심한 것 같다. '신촌지엔느'라는 것은 프랑스 빠리의 여성 시민을 의미하는 '빠리지엔느(Parisienne)'를 본뜬 것이다. 즉 '빠리지엔느'가 빠리의 여성인 것과 같이 서울 신촌의 여성을 '신촌지엔느'라고 부르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은 말이라고 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한다. 빠리의 여성을 의미하는 '빠리지엔느(Parisienne)'라는 단어에서 그 끝 부분의 발음이 '지엔느'로 된 것은 'Paris'의 끝 글자가 's'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Paris'의 철자 끝에 's'가 없어 'Paris'가 아니라 'Pari'였다면 빠리 여성을 가리키는 말은 'Parisienne(빠리지엔느)'가 아니라 '빠리엔느(Parienne)'로 되었을 것이다. '신촌'을 영문 알파벳 철자로 쓰면 'Sinchon' 정도가 될 것인데, 어떤 식으로 쓰든 간에 '신촌'의 영문 알파벳 끝 철자는 's'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신촌의 영문 알파벳 철자가 'Sinchons(신촌스)'라면 '신촌지엔느(Sinchonsienne)'가 될 가능성이 있으나 '신촌스'가 아니라 '신촌'인 한에서는 'Sinchonsienne(신촌지엔느)'라는 발음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신촌지엔느(Sinchonsienne)' 대신에 '신초니엔느(Sinchonienne)'라는 표현은 그런 대로 용인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을 만든 카피라이터가 이러한 사정을 몰랐겠는가? 몰랐을 수도 있고 알면서도 그리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소비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광고의 속성을 고려해 보면 '빠리지엔느'라는 표현에 익숙한 소비자에게 '신초니엔느(Sinchonienne)'보다는 '신촌지엔느(Sinchonsienne)'라는 표현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어쨋든 "○○○○백화점은 '신촌지엔느'를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고안해 낸 카피라이터의 창작은 훌륭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이 백화점의 명칭도 바뀌고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광고 문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프랑스어학을 전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광고학을 전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백화점은 '신촌지엔느'를 사랑합니다."라는 표현 자체에 대하여 무슨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나에게 '라 마르세이예즈'와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은 몇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II. 썸뜩한 '라 마르세이예즈'를 지금도 부르는 프랑스 사람과 '붉은 악마'를 바꾸고자 했던 우리의 차이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인 1998년, 프랑스 빠리 근교의 한 축구 경기장에서는 큰 축제가 벌어졌다.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 국가대표팀이 축구에 관한 한 세계 최강으로 자부해 온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누르고 우승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축구는 상당히 오랜 동안 월드컵 유럽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하여 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가지도 못하는 침체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에 세계 축구계를 평정한 것이다. 결승전에서 승리한 프랑스 축구팀과 함께 프랑스 관중들은 한 목소리로 그들의 국가 '라 마르세이예즈'를 부르며 환희를 만끽하였다. '라 마르세이예즈'의 가사가 어떠한가? "...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처자를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 나가자! 나가자! ...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우리 나라 만세". 뜻이 깊고 차분한 정서가 깃든 우리의 국가 애국가와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다.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가사를 국가로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 '라 마르세이예즈'는 1792년 4월 26일 프랑스 공병대위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작곡한 '라인주둔군을 위한 노래(Chant de guerre pour l'armée du Rhin)'에서 유래한 것이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터짐에 따라 혁명정신이 퍼질 것을 두려워한 주변 국가들이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함에 따라 프랑스의 시민들은 의용대를 조직하여 이들과 맞섰는데, 이 때 시민군의 군가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라 마르세이예즈'였다. 이런 사정을 보면 '라 마르세이예즈'의 가사내용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라 마르세이예즈'는 1795년 7월 14일 혁명 6주년 때에 국가로 결정되었고, 제1제정 이후 폐지되었다가 1879년 2월에 다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에 강렬한 혁명의 의지를 담은 격렬한 노래를 프랑스는 왜 지금까지 그대로 국가로 유지해 왔을까? 평화를 찬미하고 맑은 정서가 가득한 곡을 만들 수 있는 작곡가와 작사가가 없었기 때문일까? 자세한 내용을 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프랑스 사람들은 그 섬뜩한 가사의 '라 마르세이예즈'를 아주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부른다는 것이다. 가사의 뜻을 잘 몰라서 일까?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세계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럴 가능성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 무지막지한 가사의 '라 마르세이예즈'를 부르는 프랑스 사람들은 그 가사를 현재의 상황에 맞게 스스로 걸러 받아들이면서 행진곡 풍의 씩씩하고 흥겨운 리듬을 즐기는 것은 아닐까? 만일 '라 마르세이예즈'를 부르는 프랑스 사람들의 태도를 이렇게 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 싸움만 좋아하고 피를 즐기는 참으로 몹쓸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런 성향이 강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그들은 '라 마르세이예즈'를 원래의 가사 내용과 달리 "불의에 맞서 싸우면서 씩씩하게 살아가자!"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결론의 정확성을 100% 보증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 내가 프랑스 유학시절에 만난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은 그와 같은 것이다. '붉은 악마'라는 표현을 기억한다. 1980년대 초반에 멕시코에서 열렸던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우리 나라가 4강에 올랐을 때, 현지 언론이 붉은 유니폼의 한국 선수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악마'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여기에서의 '악마'란 무시무시한 의미의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선수들을 칭찬하는 의미가 포함된 말이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붉은 악마'는 한국의 축구응원단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작년이던가? 어느 일간지에서 이런 기사를 보았다. 축구응원단의 명칭으로서 '붉은 악마'가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악마는 그야말로 악의 상징이기 때문에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붉은 악마'라는 표현에는 이미 한국 축구의 자랑스런 역사가 숨어 있으며, 여기에서의 '악마'란 악의 상징이 아니라 무언가에 몰두하고 힘이 있는 그런 존재를 의미한다고 새기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한국 축구응원단의 명칭은 '붉은 악마'이다. 옛 것을 굳이 억지로 바꾸지 않고 옛 것을 유지한 채 그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지혜를 얻는 태도를 '溫故而知新'이라 했던가? III. '신촌지엔느'와 '빠리지엔느'의 차이 '신촌지엔느'를 검색어로 하여 컴퓨터의 마우스를 클릭하면 일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중에는 '신촌지엔느'에 대한 낱말 풀이도 있다. 그에 따르면, '신촌지엔느'란 빠리 여성을 일컫는 '빠리지엔느'에서 따온 신조어로 서울, 특히 신촌지역의 젊은 멋쟁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신촌지엔느'라는 말이 어법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다 친다 하더라도 '신촌지엔느'의 개념정의에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요소가 상당히 배어있다. '신촌지엔느'는 '빠리지엔느'에서 따온 신조어라고 하였는데, '빠리지엔느'와는 몇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첫째, '빠리지엔느'가 빠리의 여성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빠리의 여성은 빠리에 생활의 주된 근거를 두고 있는 여성을 말하는 것으로 빠리 이외의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잠시 빠리에 들른 여성은 결코 '빠리지엔느'로 불려지지 않는다. 이와 달리, '신촌지엔느'는 주된 생활근거를 신촌에 두고 있는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잠시 신촌을 다녀가는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신촌지엔느'는 '빠리지엔느'와 큰 차이가 있다.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刹那性'이 거슬린다. 둘째, '빠리지엔느'는 어떤 여성이 멋쟁이인가와 상관없이 모두 '빠리지엔느'이다. 이에 반해 '신촌지엔느'는 멋쟁이 여성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촌지엔느'와 '빠리지엔느'는 본질적으로 개념을 달리한다. 멋쟁이는 좋은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말하는 멋쟁이가 마음이 꽉차고 외모까지 아리따운 진짜 멋쟁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에서 옷차림만 멀쩡하고 머리와 가슴은 비어있는 '空虛性' 같은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셋째, '빠리지엔느'는 어떤 여성의 나이가 얼마인가와 상관없이 모두 '빠리지엔느'이다. 이에 반해 '신촌지엔느'는 젊은 여성만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 있어서도 '신촌지엔느'와 '빠리지엔느'는 본질적으로 개념을 달리한다. '빠리지엔느'와 달리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에서 젊은 사람만이 최고라는 '無禮性'이 거슬린다. '신촌지엔느'라는 말 속에서 '刹那性', '空虛性' 및 '無禮性'이라는 극히 부정적인 요소를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광고계에서는 격찬을 받을만한 신조어를 평가절하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다. 나로서도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은 것이다. 광고는 광고이고, 이 광고로 인하여 생산과 소비가 촉진되고 그 결과로 고용도 창출되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프랑스어를 좀 알다보니 '신촌지엔느'라는 말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사실 나는 '신촌지엔느'라는 말을 트집잡아 우리의 생활태도에서 많이 보여지는 '刹那性', '空虛性' 그리고 '無禮性'과 같은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네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刹那性의 예를 보자. 찰라성은 끝내 사람을 죽이고야 말았다. 성수대교가 끊기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귀한 생명이 세상을 떠났다. 어린이 수련시설인 씨랜드에 화재가 발생하여 그 어린 생명을 저 세상으로 보냈고 자식을 잃은 어떤 부모는 삼천리 화려강산을 원망하면서 미련 없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 한강다리가 끊어져 나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또 어린이 수련시설에 불이 나고... 그 원인은 무엇일까?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것쯤이야, 이번 한번만 잘 넘겨보자"라는 식의 찰라성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네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空虛性의 예를 보자. 공허성은 우리 자신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류층이라는 용어가 꽤 이상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지적 수준이 어떠하건, 인품이 어떠하건 그저 돈만 많으면 상류층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속이 비어 있어도 돈만 있으면 화려하게 된다. 돈이 최고이다 보니 모든 질서가 돈에 의하여 정렬되고, 그 결과 삶의 목적이 참으로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지는 상황이 자주 목격된다. 멋진 차에 멋진 옷을 입고 유흥을 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람을 죽이고 어린이를 유괴하는 것과 같은 행태가 그것이다. 돈이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돈이 많다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외형적인 모양에 최상의 가치를 두는 인생은 공허한 것으로 자신을 황폐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우리네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無禮性의 예를 보자. 부모가 없다면 어찌 자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제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을 것이며 또 내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부모를 부정하고 어제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무례한 것이며 더 나아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세태를 보면 아름다운 예절과 바른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있는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TV를 통하여 방송되는 대중가요 프로그램을 보자. 20세 전후의 소위 'N세대' 연령층에 적합한 취향의 노래들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은 그러한 노래만이 노래의 전부인 양 착각을 하여 그런 노래를 모르는 사람을 노래 자체를 모르는 집단으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배제하기 힘들다. 만일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그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어루만졌던 수많은 노래는 없는 것으로 되는데, 이것은 문화적 손실임에 분명하다. IV. 이야기를 마치며 그 섬뜩한 가사의 '라 마르세이예즈'를 지금도 열심히 불러대는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옳고, '붉은 악마'라는 명칭을 바꾸고자 했던 우리의 태도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예를 통하여 우리의 사고태도를 한 번 정비해 보자는 것이다. '신촌지엔느'라는 표현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들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刹那性', '空虛性' 그리고 '無禮性'을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 이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풋풋한 마음으로 씩씩하게 오늘을 채우고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분명 '刹那性'과 큰 거리가 있다. 가슴을 순화하고 슬기를 기르기 위해 땀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空虛性'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날들을 살피면서 선인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無禮性'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신촌지엔느'라는 신조어를 용인하고자 한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생각해도 도저히 용인되지 않는 것도 꽤 많다. 횡단보도에 설치되어 있는 신호등에서 녹색 점멸신호도 그 중 하나이다. 녹색등이 켜지자마자 결코 느리지 않은 걸음으로 걸었건만 왜 횡단보도 중간 정도쯤에서부터 녹색등이 깜빡이는 것일까? "아직 빨간등이 되려면 한참 있어야 되니, 천천히 가라!"는 뜻인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교통신호등은 누구를 위하여 설치되어 있는 것인가? 교통신호를 통하여 걸음속도를 빠르게 함으로써 국민의 체력향상을 도모하기 위함인가? [200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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