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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세 개의 모과 이야기

세 개의 모과 이야기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10월 중순 쯤으로 기억됩니다. 다른 일로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다가 연구실에 나와 보니 은은한 향기가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살펴보니 책상 앞에 모과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어떤 제자가 자기 집 마당에서 키우던 모과나무에 열린 것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위에도 모과나무가 꽤 여러 그루 있는데, 거기에 열린 모과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큼직한 것이었습니다. '모과'라는 이름은 나무에서 열리는 참외라는 뜻의 목과(木瓜)에서 왔다고 합니다. 모과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라고 하는데,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나무입니다. 옛날에 한 도승이 생각에 빠져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모과나무 위에서 열매가 툭 떨어지기에 놀라 돌아보니, 그 옆에 무서운 뱀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 도승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그 후 오래오래 살면서 많은 중생들을 교화했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이고 보면, 사람들의 모과에 대한 사랑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개의 모과가 내 연구실로 이사를 온 이후 지금까지 세 개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연두색이 강했던 색깔이 날이 가면서 점차 노란색을 띠더니, 이제는 고동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상 앞에 있는 모과는 내게 향기만을 건네 준 것이 아니라 몇 가지의 상념을 일게 하였습니다. 첫째, 연두색·노란색·고동색으로 진행되는 색깔 변화의 속도에 있어서 세 개가 모두 제 각각이라는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같은 나무에서 같이 살아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개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개성은 자유의 표현이며, 자유는 창조의 원동력입니다. 둘째, 모과의 색깔이 고동색으로 변해 가는 것은 아마도 썩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 속에서도 모과의 향기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모습은 자신에 대한 신념이며, 신념은 세상을 지키는 힘입니다. 셋째, 모과는 맛이 억세고 껍질이 단단할 뿐만 아니라 시고 떫어서 그대로 생식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노력을 들여 가공하게 되면 멋진 맛의 차나 술을 만들 수 있고 게다가 훌륭한 약이 되기도 합니다. 모과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종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일깨우고 그 노력에 대하여 합당한 대가를 제공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노력하도록 권면하는 것은 리더쉽이며, 바른 리더쉽은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넷째, 모과는 쇠붙이를 꺼리는 성질이 있어 모과를 다듬을 때에는 동이나 대나무로 만든 칼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쇠붙이 칼을 들이대면 자기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모과의 모습은 지조를 생각하게 합니다. 조지훈 선생께서는 그의 '지조론'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모과가 좋다고 하여 너무 많은 양을 먹으면, 치아와 골절에 손상을 입고 소변을 잘 볼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모과는 절제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창조를 열망하는 '자유', 세상을 지키고자 하는 '신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노력하게 만드는 바른 '리더쉽',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지조',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절제'. 연구실 책상 앞에 있는 모과 세 개가 우리에게 주는 알찬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년 봄 청초한 연분홍 빛으로 다시 찾아올 모과꽃을 기대하며 [20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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