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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소주세율 논쟁에 나타난 '비진의표시'

소주세율 논쟁에 나타난 '비진의표시'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같은 증류주인 소주와 수입 양주에 대한 세율에 차이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는 WTO의 권고에 따라 정부는 소주세율을 위스키와 같은 수준인 100%로 하려는 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발표는 뜨거운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서 이 안에 대한 찬반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논쟁 중에 문제의 본질과 무관하게 그럴듯하게 포장된 말 같지 않은 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직업병일까?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비진의표시'에 관한 민법의 규정이 떠올랐다. 비진의표시란 표시행위가 표의자의 내심의 의사와 다르다는 것을 표의자 스스로 알면서 한 의사표시이다. 민법 제107조 제1항에 따르면, 비진의표시라도 표시된 대로의 효력이 발생하나(본문) 상대방이 표의자의 진의가 아님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무효이다(단서). 소주세율 논쟁이 법률행위가 아니며, 또한 이 논쟁에서 찬성 또는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에게 법적 의미에서의 의사와 표시의 불일치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민법의 위 규정이 문제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 나타난 논거를 진의에 비유하고 찬성 또는 반대를 표시행위에 견주어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타난다. 소주세율 인상에 찬성하는 입장의 논거 중에 '국민건강'이라는 것이 있다. 소주는 알콜함량이 20도가 넘는 고도주임에도 불구하고 값이 너무 저렴하여 과음을 조장하는데 만일 가격을 대폭 인상하면 국민의 음주문화가 바뀌어 국민건강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국민건강을 생각하는 것은 칭찬할 일이다. 그러나 소주 가격 인상과 국민건강은 특별한 관련이 없다. 소주는 가격에 대한 수요탄력성이 작기 때문에 소주세율의 인상은 오히려 소득분배의 왜곡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애주가이기는 하나 맥주는 싱겁고 양주는 너무 비싸서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1000원밖에 없는데, 예전에는 이 돈으로 스낵을 안주로 소주 한 병을 마실 수 있었으나 소주가격이 올라 1000원을 넘게되면 깡소주라도 마시기 위해 강도짓을 할 지 모르는 일이다. 사실 국민건강을 논거로 하는 의사표시는 진의와 표시가 불일치하는 경우이며, 특히 이 불일치를 의사표시의 상대방이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무효이다. 한편, 다른 사람이 아닌 주류업계가 소주세율 인상에 반대하면서 그 논거로 소득분배의 왜곡을 든다면 이것 또한 무효일 가능성이 크다. 소주세율 인상의 논거로는 주세율의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다른 나라의 보복관세 등이 예상된다고 하면 족하고, 이를 반대하는 논거로는 매출감소로 인하여 회사가 어려워진다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 정도만 말해도 우리는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지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 속에서 위와 유사한 종류의 무효인 의사표시를 접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오직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정치인, "나는 오직 사원의 복리와 국가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회사경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기업가의 말들은 무효일 가능성이 크다. 별 문제도 아닌 것을 비진의표시 운운하며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은 아마도 직업병일 듯 싶다.

[고대법대소식 제16호(199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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