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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신라종과 고려종의 가장 큰 차이

신라종과 고려종의 가장 큰 차이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학기 중에 미루어놓았던 일 몇 가지를 마치고 나니 벌써 1월의 막바지가 되었다. 이제 진짜 방학 같은 느낌이 들긴 하는데 따져보니 방학이 30일도 남지 않았다. 이리저리 허둥대다가 달력을 보면 어느새 방학의 끝자락··· 이번 겨울방학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방학에는 무언가 여유도 즐겨야 하는데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또 나를 맡겨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내 자신의 무력함을 다시 보고야 말았다. 어디라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떠난 곳이 전라도 부안이었다. 채석강을 비롯한 변산반도의 수려한 경치는 한겨울에도 여전하였다. 파란 바다, 붉게 타는 저녁놀, 신선한 바람, 고요한 숲길··· 정말 잘 왔다는 생각과 함께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내소사를 찾았다. 전에도 이 절을 찾은 적이 있었지만 참 평화로운 곳에 얌전하게 자리잡은 절이라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모습들이 잘 떠오르지 않아 다시 한 번 가보기로 하였다. 입구에서부터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쭉 뻗은 전나무 숲길에 들어서고 나니 그 향기로 인하여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내소사는 그 역사에 걸맞게 귀한 문화재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절이다.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영산회계불탱화(보물 제1268호), 고려동종(보물 제277호) 같은 것이 그것이다. 전나무 숲을 지나 일주문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그 곳에 약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들을 뚫고 통과하는 것은 안 될 일 같았다. 왜 사람들이 모여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들은 한 스님으로부터 내소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직장동료들이 단체관광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내친 김에 나도 귀동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닌 척하면서 사실은 계속 그들 무리를 따라 다니던 중에 마침내 고려동종 앞에 이르렀다. 스님의 설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종은 고려 고종 9년인 1222년에 제작되었습니다.” 몇 가지 설명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스님이 무리를 향하여 질문을 던졌다. “신라의 종과 고려의 종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일까요?”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이 곳 저 곳에서 나름대로의 답을 제안하기 시작하였다. 색깔이 다르다느니, 무늬가 다르다느니, 종의 상부가 다르다느니, 종의 하부가 다르다느니, 테두리가 다르다느니··· 가지각색의 답이 등장하였다. 누가 어떤 제안을 할 때마다 나는 솔깃 솔깃하였다. 그러나 스님의 표정은 “아니올시다!”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관광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침묵을 지키는 방법으로 이제 정답을 찾는 것을 포기한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그때 스님의 말씀, “신라의 종과 고려의 종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 크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숭불정책으로 인하여 사찰이 많이 지어지고 그에 따라 종에 대한 수요도 크게 증가했는데 그 종을 만드는 재료는 한정되어 있어 종의 크기를 작게 하는 방법으로 각 사찰에 필요한 종을 조달했다는 것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신라의 종과 고려의 종 사이의 차이가 어디 크기뿐이겠는가? 그러나 나는 스님의 판단이 여러 가지로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하였다. 종의 모양, 종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 등에서 예술적 사조의 차이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는 종의 크기의 차이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할 것 같다. 한정된 양의 재료를 가지고 몇 개의 종을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에 앞서는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종의 모양과 문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종이 있은 후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만약 신라의 종과 고려의 종의 가장 큰 차이를 그 크기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고 이를 기초로 신라와 고려의 문화의 차이를 다른 사항에까지 유추하고자 한다면 낭패를 당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낭패가 아니라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학문을 하는 내게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종은 만들어야 하겠고 종을 만들 재료는 유한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 중에서 가장 공정한 것은 종의 크기를 작게 하는 것 밖에는 없다. 같은 상황에서 “신라의 종 수준의 규모가 아니면 종이라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크기에 집착했다면 대규모의 사찰에만 종을 비치할 수 있도록 하고 중소규모의 사찰이 종을 비치하는 것을 불법화하는 것과 같은 매우 억지스런 수단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소사의 고려동종 앞에서 한 생각으로는 좀 지나친 비약이라는 느낌도 지울 수 없기는 하다. 어쨌든 전나무 숲을 지나온 신선한 바람 속에서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2007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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