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양배추에 대한 추억

May 31, 2003

양배추에 대한 추억


명순구(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프랑스에 유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프랑스에는 당시에도 대형 할인점이 여러 개 있었는데, 장을 보기 위하여 처음으로 간 곳이 대형 할인점 중에서도 가장 큰 곳이었다. 유학 초반인데다 생전 처음 보는 대형 할인점이다보니 그 규모 및 분위기 등 모든 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생선매장·식료품매장·과일매장·정육매장·가전제품매장·그릇매장... 모든 매장의 분위기에서 한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분위기에 약간 적응하고 나서는 금방 다른 느낌을 받게 되었다. 매장의 물건을 하나 하나씩 뜯어보니 우리나라에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감자도 내가 보아왔던 감자요, 대파도 내가 보아왔던 대파요, 양파도 내가 보아왔던 양파요... 이러한 때에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렇고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유학생활 초기에 가질 수 있는 막연한 두려움을 완화시키고자 노력한 기억이 있다. 

   프랑스의 대형 할인점 채소매장에는 여러 가지 채소가 쌓여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날 아내와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양배추였다. 김치를 담그기 위한 재료로 양배추를 선정하고 그것을 구입하고자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도 우리가 먹는 일반 배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사기 위해서는 중국시장까지 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중국시장은 아주 멀리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김치재료로서 양배추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야채를 보면 서양인들은 샐러드를 만들 생각을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소금에 절여 김치를 만들 생각도 한다는 점에서 문화의 차이를 느끼는 대목이었다. 유학생활 전에는 양배추 김치를 먹은 적이 없어서 그 맛이 어떨까 궁금했었는데, 아주 훌륭한 맛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유학시절에는 가끔씩 양배추 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오랜 동안 잊고 있던 양배추에 대한 추억을 되살리게 된 것은 강원도 산골로 여름여행을 갔을 때였다. 높은 산골에다 일군 조그만 밭에 양배추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양배추가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호냉성(好冷性) 채소이다보니 강원도의 고냉지에서 많이 재배하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별 생각 없이 양배추 하나에 시선을 고정하게 되었다. 그 순간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양배추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칠고 진한 녹색을 가진 몇 개의 겉잎이 탐스럽고 동그란 안쪽의 속잎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양배추를 시장 진열대에 내놓을 때에는 겉잎을 모두 떼고 진열해 놓기 때문에 겉잎까지 달린 양배추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진 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양배추의 모습에는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 탐스럽고 깨끗한 속잎과는 달리, 겉잎에는 크고 작은 많은 구멍이 뚫려있고 그 모양 또한 반듯한 느낌을 주지 못했다. 벌레들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생각하였다. 더 가까이 바라보니 진딧물을 비롯하여 몇 종류의 벌레들이 그 겉잎 위에서 풍성한 파티를 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벌레들이 겉잎에서만 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나의 작은 씨에서 싹이 나와 풍성한 양배추로 성장하고, 그것이 꽃을 피워 수많은 씨를 퍼뜨리는 양배추의 생명활동을 생각해 보자. 양배추도 대자연의 일부인 이상 다른 존재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양배추의 꽃에서 수많은 씨가 여물기 위해서는 곤충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고 보면 양배추로서는 자신의 겉잎을 벌레에게 먹이로 제공함으로써 그것을 먹고 자라난 곤충들에게 다시 귀중한 원조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만으로만 보면, 양배추의 잎과 그 곳에 붙어 있는 벌레는 자연생태계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관계로 보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배추의 겉잎에 벌레가 집중되어 있는 모습은 예사롭게 넘길 일만은 아니다. 벌레들이 겉잎에서만 놀고 있는 것은 양배추에 의하여 의도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즉 벌레들이 다른 곳으로는 가지 못하고 겉잎 부분에만 머무르도록 하기 위하여 겉잎 자신이 벌레의 취향에 맞는 맛과 색깔로써 벌레들을 유인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보다 결정적으로 양배추의 생명활동을 주관하는 속잎 부분에서는 꽃대를 세워 꽃을 피우고 수많은 씨를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양배추로서는 벌레에게 자신이 가진 것 일부를 주는 것이 도리에 맞는 행동이다. 양배추 자신도 벌레로부터 받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양배추는 그의 도리를 다하면서도 벌레에게 줄 것과 주지 않을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남에게 주어야 할 것은 이를 기꺼이 남에게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겉으로만 보면 분명히 자기 것 같이 보이지만 자기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누어야 할 부분이 세상에는 적지 않다.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눈다고 하여 내 것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누어야 할 부분을 나눔으로써 나의 것이 보다 온전해지는 경우가 많다. 

 


[200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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