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이 나라에서 법은 무엇인가? - 의약분업 사태를 지켜보면서 -

April 30, 2000

이 나라에서 법은 무엇인가? - 의약분업 사태를 지켜보면서 -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선진 외국과 비교해 볼 때, 우리 나라에는 홍보성·교육성 표어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 같다. "간첩 잡아 애국하고 신고하여 주인되자!", "체력은 국력!", "자나깨나 불조심!",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등과 같이 금방 생각해도 너무나 많은 표어가 떠오른다.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이 낮아서인지 아니면 관계 당국의 국민에 대한 배려가 극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의 머리 속에는 수많은 표어가 각인되어 있다. 

  익숙한 표어들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약 좋다고 남용말고 약 모르고 오용말자!",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누가 언제 만든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이 두 표어에 있어서 공통되는 테마는 무엇인가? 국민의 건강이라는 점에 의문이 있을 수 없다. "처방은 의사에게, 조제는 약사에게"로 요약되는 의약분업이 최근 사회적으로 핫 이슈가 되고 있다. 국민건강의 측면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이고 당연하다고 보아야 할 의약분업이 의사들과 약사들의 집단행동으로까지 비화되는 사회적 사태로 발전된 느낌이다. 특히 근대 시민사회 이래로 대표적 전문지식인으로서 일익을 담당해 온 의사들이 진료실을 걸어 잠그고 거리로 뛰어나갔으니 말이다.

  의약분업은 1963년에 제정된 약사법에서 이미 규정하고 있었던 사항이며, 특히 1994년의 개정 약사법에는 늦어도 1999년까지는 의약분업의 시행을 위한 대통령령을 제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부는 이 규정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1996년 국무총리 직속으로 의료개혁위원회를 설치하고, 1997년 의료개혁위원회가 의약분업 실시방안을 마련한 바 있으며, 1998년에는 의약분업추진협의회가 구성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99년 2월 정치권이 의약분업 실시 시기를 2000년 7월로 연기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약 1년 동안 수면 밑에서 잠자는 척하던 의약분업 문제가 최근 수면 위로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1970년의 의약분업추진위원회와 1988년의 국민의료심의위원회의 의약분업안이 의사와 약사간의 대립으로 무산되었는데, 혹시 양자 모두 국민건강을 말하면서 진짜 속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1999년 2월 22일 보건복지부가 주요업무 추진계획에서 의약분업을 예정대로 1999년 7월에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는데, 그로부터 이틀만에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이를 번복하였는데, 이러한 정치권의 태도가 혹시 얼마 전에 치루어진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을 가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2000년 7월로 연기된 의약분업에 대한 의사들의 집단적 의사표시가 왜 국회의원 선거일을 목전에 둔 시점에 터져 나왔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각별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1994년의 개정 약사법에 늦어도 1999년까지는 의약분업의 시행을 위한 대통령령을 제정하도록 분명히 규정하고 있는데, 왜 이 법규정이 지켜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법이란 무엇인가? 모든 개념정의가 다 그러하듯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Kant는 "법학자는 아직까지도 법의 개념에 관한 정의를 찾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법의 개념정의가 수월하지는 않으나 어떤 구체적인 규범을 앞에 놓고 "이것이 법인가?"라는 식으로 질문의 방향을 전환한다면 이에 대한 답은 매우 간단하게 나올 수 있다. 마치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어렵지만, 구체적인 대상을 앞에 놓고 "이것이 사람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답이 간단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약사법은 법인가? 약사법은 1963년 12월 13일 법률 제1491호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정된 법임에 틀림없다.

  법규범은 강제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규범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법은 지켜져야 하며, 법에 위반하면 일정한 제재가 따르게 된다. 그런데 늦어도 1999년까지 의약분업의 시행을 위한 대통령령을 제정하도록 요구한 약사법의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음은 물론, 법을 준수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어떠한 반성이나 제재도 거론되고 있지 않다.  

  이 나라에서 법은 무엇인가? 약사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혹시 이 법을 지켜야 할 사람이 이 법을 지키지 못한 사유가 어떤 다른 사람의 방해가 원인이 되지는 않았는가? 모두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의약분업 사태를 앞에 놓고 대부분의 논자들은, 일부는 의사의 편에서, 일부는 약사의 편에서, 또 다른 일부는 정부 내지는 정치권의 편에서 논리를 펴고 있다. 이번의 의약분업 사태는 단순히 이해관계 당사자의 밥그릇 챙기기의 문제만은 아니며, 국가 차원에서의 의료관리체계의 비합리성과 비현실성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법학을 하는 나로서는 이번 의약분업 사태를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왜 법이 지켜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법이 지켜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대하여 이토록 무감각한지 하는 것들이 머리를 무겁게 한다.

  매년 우리 국민이 의료비용으로 지출하는 돈이 GNP의 7%에 달하는 20조원이라고 한다. 약값이 전체 의료비의 30%를 차지하고 항생제 내성균 출현율이 세계 1위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약물 오·남용에서 헤매고 있다. 의약분업의 경제성 평가에 대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행 최종 시안대로 의약분업이 시행된다면 국민이 치러야 하는 비용보다 얻게 되는 편익이 현재보다 3.69배나 높아진다고 한다. 의약분업 사안이 사태로까지 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분쟁의 당사자가 모두 의료수요자인 국민을 배려하는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은 국민건강의 차원에서 접근하여야 한다든가, 처방료와 조제료 인상으로 국민의료비 부담이 가중되리라는 걱정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마음들이 있고 이런 마음들이 커간다면 의약분업 문제는 '사태'가 아니라 '추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애결혼을 한 노부부에게 있어서 젊은 시절의 다툼이 아름다운 추억인 것과 같이 말이다. 의약분업 문제가 '사태'가 아니라 '추억'이 되는 그 날이 오면 약사법을 준수하지 않았던 사실도 함께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제생병원보 창간호(200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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