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파리가 들국화에 앉아서 하는 일이란?
파리가 들국화에 앉아서 하는 일이란? 명순구(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 10월이다. 10월을 생각하면 '변화', '준비' 같은 개념이 떠오른다. 여름 햇빛을 받아 무성한 잎을 이용하여 왕성한 생명활동을 하였던 식물들은 다음 해의 또 다른 생명활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양을 바꾼다. 10월 하면 떠오르는 꽃으로는 단연 국화가 아닐까 한다. 화원의 쇼윈도에서 탐스럽고 화려한 모습을 뽐내는 형형색색의 국화는 가을을 알리는 전령이다. 그러나 누가 보아주건 말건 상관없이 제 스스로 자라나 청명한 하늘 아래 가을바람에 산들거리는 들국화 또한 가을을 확신시켜주는 예쁜 꽃이다. 九節草라고도 하는 들국화는 보통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데, 오랜만에 찾은 10월의 산길에는 들국화가 한창이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가꾸어 놓은 듯 산길 한 편을 장악하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국화를 바라보니 꽃 위에서는 여러 종류의 벌들이 앉아 바쁜 몸놀림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철이 철이니 만큼 나비들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며 꿀을 모으는 벌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중에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벌들과 함께 파리가 들국화 꽃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파리가 무엇 때문에 꽃에 앉아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꽃'과 '파리'라는 것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꽃,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파리. 사람이 가장 더럽게 생각하는 곳에 발을 담갔다가 곧바로 음식물에 앉는 습성으로 인하여 늘 불쾌감을 일으키는 파리. 벌이나 나비가 꽃에 앉아 있다면 꿀을 먹고 있겠거니 할 수 있겠으나, 도대체 파리가 무슨 일로 꽃에 앉아 있단 말인가? 꽃 위에 앉아 낮잠을 자는 것일까?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아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잠시 쉬는 것일까? 무언가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쉬고 있는 모습도 아니었다. 파리가 벌과 나비와 같이 꿀을 먹는 것은 아닐 것인데, 자는 것도 아니고 쉬는 것도 아니라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별 놈의 파리가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옮겼다. 들국화에 앉아 있는 파리의 모습은 상당한 시간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혹시 파리가 들국화에 앉아 꿀을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집에서 이 궁금증을 해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책을 뒤적이는 것이었다. 백과사전의 파리에 대한 설명부분은 이러하였다. "환봉아목에 속하는 곤충을 총칭하여 파리라고 한다. 이들은 세균, 바이러스, 윤충질환, 원충의 매개체나 중간숙주 역활을 한다...성충은 낮에 활동하며 꽃꿀을 빨아먹거나 썩은 것에 모여드는 것이 많은데, 광대파리매 등과 같이 다른 벌레를 잡아먹는 것, 저녁때나 밤에 활동하는 것도 있다..." 아뿔싸! 꽃꿀도 파리의 주식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들국화에 앉아 파리가 한 일은 꿀을 먹는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파리라고 해서 더러운 것만 먹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파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거지가 내미는 동냥 깡통에도 썩은 밥이나 먹다 남은 밥을 채워줄 것이 아닐 것 같다. 거지가 고상한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어도 괴상한 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늘 조용하고 묵묵하게 살던 사람이 큰 소리를 치며 "세상이 뭐 이 따위야?" 라고 외친다고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조용하고 묵묵하게 살아온 것은 큰 소리를 지를 줄 몰라서 그리 한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일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모종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들국화에 앉아 꿀을 먹고 있던 파리. 그대는 나에게 결코 작지 않은 깨달음을 주었네. 지금 나는 그대에게 고마운 마음과 아울러 지난번의 오해에 대하여 진심 어린 화해를 청하네." [2001.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