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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땅바닥에서 진한 향기를 내는 꽃의 이름을 찾아

땅바닥에서 진한 향기를 내는 꽃의 이름을 찾아 명순구 (고려대 법대 교수)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아마 4월 말 아니면 5월 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연구실 학생들과 학교 근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교정의 한 모퉁이를 지나는데 갑자기 라일락 향기가 밀려들었다. 그 때는 여기저기에서 라일락이 그 진한 향기를 한창 뽐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향기가 특별히 이상할 것도 신기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 향기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있어야 할 라일락 나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라일락 향기가 나는 것은 분명한데 근처에 나무가 없다니... 순간이지만 몇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심지어는 “라일락 향기가 50미터 또는 100미터까지 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까지 가져보았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동행하던 학생들에게 물었다. “라일락 향기가 나지?” 몇 초가 지나 세 명의 학생들은 모두 “네!”라고 답을 하였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라일락 나무가 보이지 않아! 어찌된 일이지?” 두리번두리번... 이제는 학생들도 나와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몇 분 정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이 신기한 현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생들이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나는 거기에 열중하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돌리며 향기의 근원을 찾고자 애를 썼다. 라일락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것과 비슷한 향기를 내는 꽃이라도 반드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향기의 근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어디 한 두 개인가... 모르는 것이 오늘 하나 추가되었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뭔가 가정(假定)은 필요한 것 같아 “라일락 향기를 내는 잎을 가진 나무도 있을지 모른다!”라는 정도로 스스로 타협을 하였다. 우리가 서 있던 곳에서는 꽃이라고 생긴 것은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정리하고 발길을 뗄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을 다시 시작하면서 무심코 땅을 쳐다보았다. 땅에 딱 달라붙어 자라고 있는 이름 모를 작은 풀이 눈에 들어왔다. 그 풀에는 보랏빛이 섞인 분홍빛 꽃이 올망졸망 빽빽하게 피어있었다. 혹시 향기의 주인공이 그 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더 컸다. 나의 수준으로는 “이렇게 땅을 기어 다니면서 자라는 풀에서 무슨 그런 향기가...”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허리를 숙여 작은 꽃 한 송이를 따 냄새를 맡아보았다. 아뿔사! 향기의 원천은 바로 그 꽃이었다. 그때 나에게 밀려든 놀라움과 신기함... 아주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온몸을 스쳤다. 그 꽃을 뒤로 하고 연구실로 걸어오는데 머릿속에 무엇인가 여러 가지들이 겹겹이 쌓이기 시작했다. “향기의 주인이 내 발 밑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왜 전혀 하지 못했을까?” “향기의 근원을 찾기 위해 왜 내 키보다 높은 곳만 바라보았을까?” 그날 이후로 틈틈이 그 꽃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식물도감을 뒤져보았다. 그러나 그 꽃은 보이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비교적 낭만적인 이 사업의 시행시기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가 지나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성적처리를 끝으로 1학기의 학사일정이 대강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그 꽃의 이름을 찾아내기로 마음먹었다. 웹서핑을 하다가 느낌이 오는 사이트 하나를 발견했다. 산림청에서 구축한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http://www.nature.go.kr/)이 그것이다. 그 검색시스템에 ‘꽃색깔: 분홍’, ‘꽃피는 시기: 4~5월’ 정도를 입력시키고 검색을 해보니 화면에 뜨는 것이 있었다. 그 꽃이 분명하였다. 사진과 함께 ‘지면패랭이꽃’이라는 이름이 나타났다. 어찌나 반가운지... 분류상으로 ‘꽃고비과’에 속하는 이 꽃의 원명은 ‘Phlox subulata L.’이란다. 꽃의 모양이 패랭이꽃과 비슷하고 지면으로 퍼지기 때문에 ‘지면패랭이꽃’이란다. ‘땅패랭이꽃’, ‘총생종호록’ 등으로도 불리는 이 꽃은 멀리서 보면 마치 잔디 같지만 꽃이 피기 때문에 ‘꽃잔디’라고도 한단다. 이 꽃에 대한 설명은 대충 이러하다: 미국 원산의 여러해살이 초본식물로 꽃 색깔이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다; 겨울 동안 앙상한 줄기만 남아서 사람들의 발에 수난을 당하다가도 개화기(4~9월)가 되면 다시 가득 피어난다; 꽃말은 ‘인내’ 또는 ‘희생’이다. 어떤 블로그(http://blog.empas.com/deoinga/7675356)에서 이 꽃에 관한 전설 같은 내용을 찾았다. 옛날 하늘과 땅이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직은 세상의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아 모두 제멋대로였대 예를 들면 코스모스를 피워야 할 텐데 떡하니 장미가 피고, 사과나무는 신맛이 싫다며 떡하니 감을 맺기도 했고, 하늘도 한 여름에 심술을 부려 눈을 내리기도 했거든. 하나님은 너무너무 걱정이 되었어. 그래서 이 혼돈의 세상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하셨어. “해야, 따스한 봄볕을 온 세상에 고루고루 뿌려주렴!”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이 나타나 소나기를 퍼부으며 심술을 부렸단다. 해가 화가 나서 구름에게 말했어. “야, 구름아! 소나기는 여름에 내리는 거라는 걸 몰라?” “지금 햇살을 보라구... 봄이야, 봄! 그러니 봄비를 내려야지.” “칫, 웃기네! 봄비를 내리든 소나기를 퍼붓든 남의 사...” 구름은 오히려 친구인 번개와 천둥까지 불러와 장대비를 쏟아 부었단다. 얼마나 오래 심술을 부렸던지 강물이 넘치고 둑이 무너졌어. 따스한 햇살에 돋아나던 새싹들도 홍수에 휩쓸려 자취도 없이 떠내려가 버렸지. 하나님은 구름을 불러 잘 타이르고는 봄의 천사를 보내 산야에 꽃을 심고, 나무도 심고 아름답게 가꾸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너무 많이 망가진 세상은 천사 혼자서 예쁘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대. 그래서 봄의 천사는 예쁜 꽃들에게 부탁을 했어. “얘들아! 강물에 휩쓸려 폐허가 된 곳에 가서 꽃을 피워주지 않겠니?” 그러나 예쁘다는 꽃들은 엉망인 곳이 싫어 전부 거절을 했어. 그래서 봄의 천사는 한숨을 쉬며 앉아 있었지. 그때였어.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봄의 천사님! 저희들에게 그 일을 맡겨주지 않겠어요?” 봄의 천사가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잔디들이 겸손한 자세로 서 있었단다. 봄 천사는 볼 품 없어도 그들이 고마왔단다. 허락을 받은 잔디는 들판과 산기슭 어디나 달려가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마다 푸르게 덮었지. 너무도 기쁜 봄의 천사는 하나님께 잔디에게 선물을 줄 것을 요청했고, 하나님은 잔디의 머리에 예쁜 관을 씌워주셨단다. 그래, 그게 바로 꽃잔디야. 라일락과 비슷한 향기를 가진 몹시 키가 작은 풀꽃, 그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꽃잔디’라는 이름이 제일 마음에 든다. 인내와 희생이라는 꽃말도 그에게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향기의 근원을 탐색함에 있어서는 위만 볼 일이 아니라는 엄중한 가르침을 내게 선사한 꽃, ‘꽃잔디’... 오늘은 그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밥값을 한 것 같다.

<2007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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