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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다산(茶山)의 땡땡이가 주는 위안

다산(茶山)의 땡땡이가 주는 위안 명순구

어린이들의 책꽂이에는 대부분 위인전이 꽂혀있다. 위인전 속에는 우리나라와 외국의 여러 위인들의 빛나는 인생이 담겨있다. 어린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특별히 존경하는 인물을 선택하기도 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밑그림도 그리기 마련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분은 오성(鰲城) 이항복과 다산(茶山) 정약용이었다. 특히 다산 선생님은 그 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대학교수로 일하는 내게 있어서 지금까지 변함없는 흠모의 대상이다. 아니 내 나이가 더할수록 그의 총명함과 학문적 비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다산의 생가를 비교적 자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교수가 된 직후 아내와 함께 다산의 생가 근처를 산책하다가 아내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다산 선생님은 학자로서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는데 당신은 몇 권을 쓸 수 있을까요... 학자의 업적을 어찌 그 양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을 다산 선생님과 비교하는 것 초차 이상한 일이다. 아내의 그 말은 남편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히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은유적인 아내의 충고에 나도 웃음 섞인 말투로 이렇게 답했다. “다산 선생님은 생애 약 20년이 귀양살이였고 그 시간은 실제로 연구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물을 냈지만, 내가 앞으로 쓸 수 있는 연구년은 고작 5~6년에 불과하니 나는 다산 선생님 정도는 안 될 것 같아요!” 연구년을 기준으로 다산 선생님과 비교를 해봐도 자신이 없었다. 그런 계산이라면 500권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권수의 책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어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다산 선생님의 책은 붓으로 쓴 것이어서 글자가 크기 때문에 책의 권수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글자 수를 가지고 비교해야 할 것 같아요!” 이에 대한 아내의 답은 이러했다. “다산 선생님의 책은 한자로 되어있는데 어떻게 그 문자와 한글의 한 음절을 비교할 수 있나요?” 재미삼아 나눈 이야기였지만, 역시 다산 선생님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 다산 선생님에 관해서 좀 색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산이 쓴 『遊天眞庵記』(유천진암기)에 들어있는 내용이다(정민, 『미쳐야 미친다』, 푸른역사, 2005, 323~324면). 정사년(1797년) 여름 나는 명례방(지금의 명동)에 있었다. 석류꽃이 막 망울을 터뜨리고 보슬비가 갓 개자, 초천(苕川: 다산의 생가 부근)에서 물고기를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다. 이때 법제가 대부는 위에 아뢰어 고하지 않고서는 도성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뢰어 보았자 허락하지 않을 것이 뻔했으므로, 마침내 그저 가서 초천에 이르렀다. 이튿날 절강망 그물을 가져다가 고기를 잡으니, 크고 작은 놈이 50여 마리나 되었다. 작은 배는 무게를 감당치 못하여 가라앉지 않은 것이 경우 몇 치뿐이었다. 배를 남자주(藍子洲)로 저어가 즐거이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먹고 나서 내가 말했다. “옛날 장한은 강동을 그리면서 농어와 미나리를 말했었는데, 물고기는 내가 이미 맛보았다. 지금은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이니 어찌 천진암(天眞庵: 다산의 생가 부근의 암자)에 가 놀지 않겠는가?” 이에 형제 네 사람이 집안사람 서너 명과 함께 천진암으로 갔다. 산에 들어서자 초목이 울창하고, 산 속엔 온갖 꽃들이 활짝 피어 그 꽃다운 향기가 매우 짙었다. 또 온갖 새들이 화답하며 우는데 그 소리는 맑고도 매끄러웠다. 가다가는 듣고 듣다가는 가면서 서로 돌아보며 모두들 즐거워하였다. 절에 이르러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조리며 하루 해를 보냈다. 이렇게 사흘을 놀다가 비로소 서울로 돌아오니, 무릇 얻은 시가 20여 수였다. 먹어본 산나물은 냉이와 도라지, 고비와 고사리, 그리고 두릅 따위 대여섯 종류였다. 당시 35세의 다산은 법제가 대부라는 관직에 있었는데 상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무단으로 근무지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3일을 실컷 놀다가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다산이 땡땡이를 쳤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내게 묘한 충격과 함께 다산 선생님 같은 분도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 잔잔한 위로를 주었다. 사실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은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을 극히 위대한 다산의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내게 다산에 대한 흠모와 함께 그를 닮고 싶다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었다. 이것이 위인전이 추구하는 일반적인 효용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위인전을 볼 때마다 마음 한켠에서 끊임없이 그리고 다소 격렬하게 일어나는 묘한 절망감도 누를 길이 없었다. 위인전 속의 위인은 대체로 내가 구구단을 외우려고 끙끙대던 나이에 이미 대학생 정도의 수준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게 있어서 위인전은 절망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런데 탁월한 위인 다산이 땡땡이를 감행하다니... 우리 같은 일반인이 하는 짓을 다산도 똑같이 했다는 사실은 내게 적지 않은 위로를 선사했다. 내가 위인전을 읽으면서 느꼈던 절망감의 극치는 오성(鰲城) 이항복의 경우였다. 그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 중에 대장장이 이야기가 특히 그러했다. 대장장이가 무심코 버린 쇳조각을 하나하나 모았다가 파산한 후에 돌려주어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 어린 이항복은 대장장이가 물건을 만들면서 작은 쇠끝을 그냥 버리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하면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양반 체면에 대장장이가 버린 것을 손으로 주울 수는 없어서 앉아 노는 척하면서 엉덩이로 깔고 앉았다가 집으로 가져갔다. 눈치를 챈 대장장이는 어느 날 심술이 나 아직 뜨거운 쇠끝을 버렸는데 이항복은 엉덩이를 데면서도 끝까지 깔고 앉았다가 집으로 가져갔다. 가난뱅이가 된 대장장이에게 이항복은 “내 영감이 오늘날 이렇게 되리라 짐작하고 있었소. 그렇게 끊어진 쇠붙이를 함부로 버리니, 그게 모두 합치면 얼마나 많겠소? 그래서 양반 체면에 손으로 집어 올 수는 없어 엉덩이로 물어다 모았더니만 그게 두 독이나 되었다오. 그것은 애초부터 당신 것이니 가져다가 대장장이 일을 계속하도록 하시오. 늘그막에 고생이라도 면해야지!” 대장장이는 그 쇠붙이를 가지고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고 말년을 여유 있게 보냈다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위인의 일화 중 내게 가장 절망감을 준 것은 이 에피소드였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나이에 나는 전날 구슬치기에서 친구에게 잃었던 구슬에 마음을 빼앗기고 어떻게 하면 구슬치기를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으니 절망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절망감은 단지 어릴 때만의 일은 아니고 지금도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니 다산 선생님의 땡땡이 사건이 내게 주는 위안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시절 다산의 위인전에 그의 땡땡이 사건도 같이 들어 있었다면 내 가슴에서 좀 더 큰 뜻이 자랄 수 있었을까? 위인전은 훌륭한 것만 담아야 하는 것인가? 위인전에 훌륭한 것과 범상한 것이 함께 담겨있으면 훌륭한 것들이 의미를 잃는 것일까? 위인전에는 훌륭한 것만 담겨 있으니 범상한 것들은 알아서 생각하라는 것인가? 어른들이라면 몰라도 어린이들에게 이것은 좀 지나친 요구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201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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