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할아버지의 눈물

June 30, 2010

할아버지의 눈물

명순구



  종강에 이은 학기말 시험, 그리고 채점을 끝마치면 교수의 진정한 방학이 시작된다. 이번 학기에는 일찌감치 채점을 끝내고 방학 모드로 들어왔다.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서 “교수는 방학 때 뭘하니?”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그때마다 나는 장난기를 섞어 이렇게 말한다. “교수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기에 두 달 넘게 휴가를 주겠니? 학기 중에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방학 때에는 그냥 놀아!” 그런데 교수의 방학은 실제로는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다. 이번 여름방학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며칠 째 이것저것 학기중에 미루어 놓은 일을 하다 보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밤이 깊어간다. 

  해야 할 일이 책상에 가득한 이 시간에 느닷없이 이미 오래전에 작고하신 할아버지 생각이 밀려왔다. 잠시 글이 없는 창밖을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컴퓨터 화면을 보니 벌써 절전 모드로 들어가 까맣게 변해 있었다. 마우스를 건드려 컴퓨터 화면을 정상화시켰건만 내 마음은 온통 할아버지 모드로 변해 버린 후였다. 오늘의 일은 여기에서 접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태어나서 국민학교 -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국민학교를 다녔다 - 1학년을 마칠 때까지 나는 충청남도의 산골마을에서 살았다. 국민학교 2학년부터 대학교까지 줄곧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건만 내 정서적 배경은 단연 10년도 채 안 되는 산골이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나는 사람의 정서는 10살 안에 모두 형성되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그 정서의 중심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

  부모님이 학업과 사업관계로 서울에 계시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부모님이 시골에 오셔서 학교는 서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완강하게 서울행을 거부했었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던 것 같고 익숙한 곳을 떠나기 싫었던 것 같다. 내 고집을 꺾지 못한 부모님은 국어책에 나오는 어깨에 메는 가방을 입학선물로 주시고 다음 해를 기약하며 서울로 떠나셨다. 그런데 나는 그 가방을 한 번도 메어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모두 책보따리를 메고 다니는데 나 혼자서 가방을 멘다는 것은 무척 쑥스럽고, 게다가 가방에 대해 그런 쑥스러움을 감수할 만한 정도의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2학년을 앞둔 어느 날 약속대로 부모님이 다시 내려오셨다. 나는 여전히 서울행을 거부하고자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건네주는 상자에 그만 마음이 흔들렸다. 그 상자에는 껌, 사탕, 캬라멜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내 의지가 심하게 꺾였던 그 순간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을 간파하셨을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울에 가면 매일 이런 것을 먹을 거야!” 애써 흔들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 저 구석에서 아버지가 “너 이번에 안 가면 크게 혼난다!”라고 소리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껌 따위에 굴복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아버지에게 굴복하는 것이 훨씬 모양새가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소리치셨다. “나는 이제는 너를 키울 힘도 없고 편히 살고 싶으니 서울로 가서 살아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펑펑 눈물을 쏟았고 며칠 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을 떠났다. 떠나면서 내가 할아버지께 무슨 말을 했는지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 기억도 없다. 다만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내 가슴에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같이 사는 동안 할아버지는 늘 나를 다리 사이에 끼고 주무셨다. 그래서 추운 겨울 이불에 들어간 순간의 그 차가움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동네 아이들이 어른들을 도와 논밭 일을 할 때에도 할아버지는 연필과 공책을 사다주시며 글자와 숫자를 쓰도록 하셨다. 장터에 다녀오실 때에는 나를 위한 선물을 챙겨오셨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누르면 뛰는 시늉을 하는 말과 화약을 넣어 방아쇠를 당기면 “딱” 소리를 내는 총이었다. 

  할머니가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였고 할아버지가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건강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라!”였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를 깊이 신뢰했다. 논에서 벼를 추수할 때의 일이다. 학교에서 내 준 숙제가 있었다. 가을걷이를 끝낸 논에서 이삭을 한 바구니 씩 주워오라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성실한 학생이었던 나는 논에 나가 벼 이삭 한 바구니를 주어다 대문 앞에 놓아두었다. 다음날 아침에 잊지 않고 학교에 가져갈 요량이었다.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 우연히 대문 쪽을 보았는데 바구니가 없었다. 깜짝 놀라 할아버지께 따져 물었더니 모르고 어제 이삭을 털어 포장한 가마니에 섞어버렸다는 것이다. “벼이삭을 가져가는 게 숙제인데...”라는 말과 함께 나는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할아버지는 가마니에 넣은 볏알을 그냥 가져가도 된다고 달래셨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숙제의 내용은 추수가 끝난 논에 있는 벼이삭을 가져가는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를 이기지 못한 할아버지는 그 아침에 논에 나가 벼이삭 한 바구니를 다시 주워오셨다.  

  성실하고 다소 강인한 성품의 할아버지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런 할아버지가 내 앞에서 펑펑 우시는 것을 처음 본 것은 1989년 1월 내가 프랑스 유학을 떠나던 때였다. 세찬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추운 겨울날 서울까지 오신 할아버지는 공항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에 짐을 싣고 있는 내게 다가와 “그곳은 먼 곳이니 이제 나는 살아서는 너를 보지 못할 것 같구나... 가서 큰 공부를 하고 와야 한다...”라고 하시며 큰 소리를 내시며 펑펑 우셨다.   

  다행스럽게도 내 유학 기간 동안 할아버지는 비교적 건강하게 잘 지내시면서 편지도 하시고 전화도 주셨다. 편지와 전화의 주제는 공부 얘기가 아닌 아프지 말라는 것이었다. 증손자의 이름도 손수 지어주셨다. 

  유학을 마치고 고향 집에 갔을 때에 나는 눈물을 보였지만 할아버지는 늠름하셨다. 그날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깜깜한 안마당에 서서 할아버지는, 내가 유학하는 동안 안채에서 사랑채로 잠을 자러 가실 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위해 하늘에 간절히 기도를 했노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빛이 없어 할아버지의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때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던 것 같다. 

  그 후로는 할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 나는 그 분을 곁을 지키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가 숨을 쉬지 않은 채 누워계신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의 흔적은 없었다. 
  


[2010.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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