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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서언] 미국계약법입문, 민들레 제1권, 법문사, 2004

착하고 순수한 청년이었습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대하던 제자였습니다. 친구의 쳐진 어깨를 볼 줄 아는 동료였습니다. 故 李承原 君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친구의 얼굴이 잘 기억나질 않았다. 볼 때마다 수척해져 가던 얼굴이 매번 낯설었기 때문일까... 몇 년쯤 지난 듯 보이는, 검은 리본을 둘러쓴 사진이 너무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같은 공간에서 나누었던 그의 목소리와 말투, 웃음소리까지도 너무나 생생한데, 그의 평상시 얼굴을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자주 자리를 비우던 그를 나는 가끔 너무나 어리석게도 책임감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언젠가, 나로서는 몇 푼 안 되어 보이는 밥값을 가지고 그가 토라졌을 때, 나는 사려깊지 못하게도 그를 대범하지 못한 녀석이라고 단정짓기도 했다. 내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데 그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계속 말을 걸 때면, 나는 잠시나마 싸늘한 차가움으로 그를 귀찮은 사람 쯤으로 여겼던 적도 있다. 우연히 마주친 길에 최신판례집 나오면 꼭 자기에게 연락해 달라던 그에게, 나는 신실하지 못하게도 어련히 알아서 구할거라는 얄팍한 이기심만을 앞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그와 가깝긴 했어도... 그 짧았던 인연의 끈조차 치열하게 당겨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서서히 그 끈을 놓아가고 있을 때에도, 거대한 두려움 앞에 떨리던 그의 흐느낌조차 감지해 낼 수 없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에게 좋은 친구이지 못했던 나는... 낯설은 사진 속 그의 모습과, 부모님의 허망한 두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고, 뒤돌아 앉아 기어이 가증스럽게 쏟아내던 눈물도, 그나마 절반쯤이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었음을 고백해야만 하는... 그렇게 나는... 마지막 가는 그의 모습 앞에서조차 당당하지 못했다... 왜 그때 그 흔한 병문안 한 번 가지 못했을까... 왜 그때 따뜻한 전화 한 통 주지 못했을까... 돌이켜보면 그건 분명 그의 얼굴이 아니었는데, 대체 왜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누자는 말 입에 담아내지 못했을까... 편안한 곳으로... 아픔 없는 곳으로... 아마도 머지않아 나는 너를 잊고 다시 웃겠지만, 문득문득 미안함에 고개 숙일 나의 가식조차 닿지 않을 곳으로... 먼 길 가는 너의 마지막 여정에 나의 이 부끄러운 고백조차도 꽃 한 송이 되길... 미안하다, 친구야... 잘 가렴... 2004년 6월 24일 李 炳 旭

발 간 사

아기가 태어나면 그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아기에게 주어지는 이름 속에는 부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희망이 녹아있습니다. 어찌 아기의 이름만 그러하겠습니까? 강, 길, 건물, 강아지, 나무... 이런 것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경우에도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연구실에서는 이번에 저작물 시리즈를 창설하면서 그 이름을 ‘민들레’라고 정하였습니다. 다른 여느 이름과 마찬가지로 ‘민들레’라는 이름 속에는 우리의 의지와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민들레는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입니다. 민들레는 자신의 주위에 늘 존재하는 바람결의 힘만을 빌려 아주 멀리까지 홀씨를 날려 싹을 내고 꽃을 피워냅니다. 민들레는 척박한 땅에서도 씩씩하게 생명으로서의 고귀한 의무를 수행합니다. 민들레는 한 뿌리에서 여러 송이의 꽃을 피우되 순서를 지킵니다. 민들레는 그 꽃에 꿀이 많아 벌과 같은 다른 생물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법학도의 법학공부의 범주가 타성과 고정관념에 젖어 시대적 소명을 다하지 못하는 점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려온 전통적인 법학적 주제에 관한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법학에 기여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일에 매달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법학적 관심이 주어져야 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소외되어 있는 영역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법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이라든가 혹은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민들레’ 시리즈를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법학적 과제를 탐색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한국 법학도의 인식의 지평을 조금씩 넓혀가고자 합니다. ‘민들레’ 시리즈의 제1권에서 다룬 주제는 미국 계약법입니다. 첫 번째 주제를 이렇게 정한 것은, 미국 계약법이 우리의 그것과 실제에 있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또한 比較私法의 주된 대상을 독일이나 프랑스, 일본 정도로 하는 태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거래제도 중에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제적으로 미국의 법에 의하여 규율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私法體系는 영미법계가 아닌 대륙법계이다.”라는 등의 말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국법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우리는 의도적인 노력을 경주하여야 합니다. 미국 법제도에 대한 깊은 인식과 이해 없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때로 ‘이성적(rational)’이라는 것과 ‘온당한(reasonable)’ 것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합니다. 법적 분쟁이 벌어진 경우에 그에 대한 법적 해결책은 ‘온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분쟁의 당사자가 모두 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성적’인 것이 동시에 ‘온당한’ 해결책입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최종적인 판단기준은 ‘온당함’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이성적’이라는 것에 만족하고 마는 경우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성적’이라는 것이 ‘온당함’을 완전하게 담보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법학을 하면서 ‘이성적’이라는 것 위에 ‘온당함’이라는 고도의 기준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어리석음은 없었는지, ‘온당함’이라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고려하기가 귀찮아 그냥 넘어간 게으름은 없었는지 반성해 봅니다. ‘민들레’ 시리즈가 세상에 나오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수고를 빌려야 했습니다. 이서현 양은 이 시리즈의 기획취지를 민들레의 이미지에 결합시켜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엠블럼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조카 정유리 양은 ‘민들레’ 시리즈의 분위기에 합당한 표지 디자인을 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두 사람의 재능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민들레’ 시리즈의 기획 업무는 일단은 제가 수행합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의 각 권에 대한 집필자는 제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연구실은 이 ‘민들레’에 우리들의 파릇한 의지와 희망을 담아가고자 합니다. 2004년 7월 22일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연구실에서 명 순 구 드림 머 리 말

“선생님! ‘코먼로(Common Law)’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교수생활을 시작하고 2~3년 정도 된 때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제가 지도를 맡은 대학원 학생들과 자유롭고 즐겁게 회식을 하던 중에 한 학생이 수줍게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대학원생이 ‘코먼로’라는 말도 모르나?”라는 비난을 들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술기운도 빌려 용기를 내어 한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의 동료들은 마치 평소에 자기도 하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해 주었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며 저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세계의 주요한 法系로는 대륙법계와 영미법계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대륙법계에 속한다.”라는 말은 많은 학생들의 머릿속에 그렇게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연구실의 회식 분위기는 지나치게 학구적인 쪽으로 흘러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를 찾은 날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3년이라는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학부 수업시간에 비교법적 시각에서 우연히 미국 계약법의 한 부분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몇 학생이 코먼로에 관심을 보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주일에 1회씩 정기적인 연구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아마 1999년이었던 것 같고 모임의 구성원은 당시 학부생이었던 국승욱 군, 유정진 양, 이승원 군, 정유선 양, 이렇게 네 명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법대생이 사법시험 준비에만 몰두하는 획일적인 환경 속에도 뜨거운 학문적 열정을 품고 있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미국 계약법을 쉽게 설명한 책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절감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연구모임은 시작된 지 약 1년 만에 해체되었고, 그동안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의 희망을 향해 성큼성큼 전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지금으로부터 꼭 한 달 전에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습니다. 고 이승원 군이 바로 그입니다. 약간 내성적인 성품이지만 친구들에게 가슴을 활짝 열었던 따스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기에 별것도 아닌 조그만 실패에 그렇게도 마음이 상했었나 봅니다. 지도교수로서 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합니다. 떠나간 아들의 영정 앞에서 슬픔에 지친 그의 어머니의 울음 속에 묻어나온 몇 마디는 저를 너무 슬프게 하였습니다. “우리 불쌍한 승원이 어찌할꼬...” “우리 승원이가 선생님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그랬는데...” “우리 승원이는 고려대학교가 좋다고 그랬는데...” “우리 승원이 석사학위도 못 받았는데...” 고 이승원 군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저립니다. 이제는 그를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고 이승원 군과의 추억이 숨어있는 이 책을 그의 영전에 바치고자 합니다. 그의 친구 이병욱 군의 담백하고 단아한 弔詞와 함께 이제는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날려 보내고자 합니다. 이 책은 미국 계약법의 기초를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쓰여 졌습니다. 미국 계약법을 소개하는 자료는 단행본 또는 논문 등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도 이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미래를 대비하고자 노력했던 선학들의 빛나는 업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계약법입문’이라는 책을 내는 것은 무용한 일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 책을 준비하였습니다. 한국에서 법학을 공부한 사람이 미국의 계약법을 알고자 한다면 그는 법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수월하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전의 학습에 의하여 취득한 그의 법학지식이 미국 계약법의 이해를 위한 촉매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반대로 만일 한국 계약법에 대한 식견이 미국 계약법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이 책은 한국에서 법학의 기초를 다진 학생으로 하여금 짧은 시간 안에 미국 계약법의 체계와 기초이론을 습득하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이 책은 ‘민들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나름대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출범시킨 시리즈인 만큼, 첫 작품으로는 제가 그간 심도있게 연구해 온 것을 주제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게으름 탓에 그러한 것을 찾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권으로 미국 계약법을 다루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미국법에 익숙한 우리나라의 법학도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늘어나야만 우리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미국법에 대한 연구가 깊지 못하고 분야별 균형도 구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미국 계약법을 체계를 가지고 소개하자니, 전체적 서술의 균형상 그간 미약하나마 나름대로 연구해 왔던 부분조차도 이 책에 포함시키는 것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의 내용 속에 제가 연구한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이 책의 저자가 되지 못하고 편저자가 된 것은 이런 연유입니다(미국 Bar/Bri 社의 교재를 주로 참조). 그러나 한국의 법학도의 시각에서 미국의 계약법을 설명하고자 하는 의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 책에 독창적인 부분이 있다면 아마 그 정도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 책의 사용방법에 대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이 책을 서술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사항별로 한국법과 미국법을 비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법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책을 읽어가면서 자연스레 스스로 비교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둘째, 문단번호(Paragraph Number)를 표시하였습니다. 이 책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앞 뒤의 서술내용을 서로 연계시켜 주는 상호참조주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상호참조주를 편리하게 매기기 위하여 문단의 맨 앞에 아라비아 숫자로 된 문단번호를 표시하였습니다(‘PN’으로 표시함). 셋째, 미국 계약법의 법률용어는 가능하면 우리말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번역을 하게 되면 너무 어색하게 되는 경우에는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넷째, 미국의 법률용어를 우리말로 번역을 한 경우라 하더라도 번역어 뒤에 괄호를 달아 원어를 표시하여 미국 법률용어에 익숙해지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분들의 가르침과 도움이 있었습니다. 우선,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를 학문의 길로 인도해 주신 崔達坤 선생님(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프랑스의 자끄 게스뗑(Jacques GHESTIN) 선생님(Université de Paris I: Panthéon-Sorbonne 명예교수), 두 은사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책의 교정작업에 참여하여 수고한 박주영 양, 김석주 군, 김영주 군, 정유선 양, 이아람 양에게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대학원 또는 사법연수원에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위 제자들의 학문적 발전과 인격적 성장을 기원합니다. 이 책의 출판을 맡아 수고해 주신 법문사의 관계자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드러나지 않는 후원자인 아내 박규연과 아들 주현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함께 전합니다. 이 책으로 한국의 법학도가 단시간 내에 미국 계약법에 대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토대 위에서 미국법에 정통한 사람이 한국 법학계에 좀 더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으로 인하여 한국 민법학의 지평이 조금이나마 넓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제게 큰 영광입니다.

2004년 7월 22일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연구실에서 명 순 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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