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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法治'와 '法恥'의 사이

'法治'와 '法恥'의 사이 명순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1905년 을사년, 국권 잠탈의 모습 앞에서 한 지식인은 '是日也放聲大哭'이라 통탄하였던가? 올 광복절의 특별사면, 이에 대하여 청와대는 '20세기 마지막 광복절을 보내며 화해와 용서의 정신'으로 행해진 것이라 한다. 국권 회복을 기념하는 날에 있었던 이번 사면을 보면서 방정맞게도 구한말 민족암흑기의 탄식이 떠오르는 것은 특정인에 대한 부적절한 사면으로 인하여 이번에는 법치주의가 통곡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 제도적 연혁이 어떠하든 간에 국가원수의 사면권도 궁극적으로 헌법질서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현철씨에 대한 사면(그것도 '변칙사면')은 사면권의 헌법내재적 한계를 일탈한 사면권 남용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로 본다. 그에 대한 사면은 일부 집단간의 화합은 될지 모르나 국민대화합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사면을 반대하던 국민의 생각은 단순한 여론이 아니라 바로 사면권의 헌법적 한계라는 점을 인식했어야 한다. 대통령은 전 대통령과의 개인적 약속보다는 헌법 제69조에 따라 취임선서에서 행한 국민과의 약속에 충실했어야 한다. 이번 사건의 발생은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에 대한 견제장치의 제도화를 생각하게 한다. 원천적으로 사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범죄를 법률로 정하거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면심사위원회'의 사전심의에 따라 사면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에 대하여 사면제도의 경직화 등을 근거로 한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사면권 남용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그렇다고 국가원수에게 사면권을 정당하게 행사할 것이라는 내용의 소위 '준법서약서'를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출현으로 묻혀지지 않을까 두렵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일이다. '法治'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 이 중대한 사태로 인하여 20세기의 마지막 광복절은 '法恥'의 날로 기억되어야 한다.

[1999년 8월 18일: 한국일보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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