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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명 순 구 (고려대 법대 교수)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에는 정원수를 보호하기 위하여 여기저기 다음과 같이 쓰여진 목판이 있다. “각종 음료수 [사이다, 콜라, 술 등]의 잔여물을 나무뿌리에 버릴 경우 수목이 고사되오니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위 문구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음료수를 먹다 남은 것을 나무에 부어 버리게 되면 나무가 죽게 되니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글이다. 오랜 기간 동안 위 문구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중앙광장을 산책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목판의 문장이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길을 끈 것은 문장의 말미인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부분이다. ‘삼가’를 독립된 단어로 사용하였으니 그 품사는 부사일 수밖에 없다. 부사로서의 ‘삼가’라는 단어에 대하여 국어사전은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히”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니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란 문구는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히 주시기 바랍니다”의 의미가 된다. 목판의 문구를 악의적으로 곡해하여 해석한다면, “음료수의 잔여물을 나무에 뿌리되 아무렇게나 뿌리지 말고 정성스럽게 뿌려라”가 될 수도 있다. 글은 어법에 맞게 써야 한다. 대학교의 캠퍼스 안에 쓰여진 문구, 그것도 세계의 명문으로 도약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는 어울리지 않는다.

[2007. 6. 8.]

P.S. 1(2007/7/2) > 이 글을 쓰고 난 후 어떤 기회에 국어학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표현은 어법에 맞는 것이랍니다. '삼가다'라는 동사의 활용형이랍니다. 요컨대, 제가 틀렸습니다.

P.S. 2(2008/1/27) > 고려대학교 중앙광장의 목판 내용이 완전히 변경되었더군요. 잘 된 것 같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문장이 있다면 그것을 쓰는 것이 현명한 태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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