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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꽃과 벌·나비가 보여주는 우아한 질서

꽃과 벌·나비가 보여주는 우아한 질서 명순구(고려대 법대 교수)

철없던 나이에는 꽃을 보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였다. 꽃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때를 맞추어 어김없이 피어나 사람의 눈, 코, 입을 모두 즐겁게 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모습, 매혹적인 향기, 달콤한 꿀,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람을 위해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꽃은 결코 사람을 위하여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식물들에게 있어서 꽃은 그저 생식수단일 뿐이다. 유성생식을 하는 생물 중 동물은 짝짓기를 하여 번식을 한다. 그것을 할 수 없는 식물로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다른 존재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루받이를 하고 씨를 맺어 번식을 할 수 있다. 그 다른 존재가 벌·나비 같은 것이고 그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식물이 준비한 것이 바로 꽃이다. 식물에게 있어서 꽃의 역할을 알고 난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벌·나비를 유혹하기 위해서라면 꽃이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생김새를 가질 필요가 있을까? 벌·나비에게 있어서는 꽃의 생김새보다는 오히려 꿀과 꽃가루가 관심의 대상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꽃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지나치게 남음이 있어 보인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비용·효용분석’의 시각에서 보면 꽃의 태도는 비효율적 행동양식의 전형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의 눈으로 보면 꽃의 행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꽃이 사람을 위해 피어난 것이 아니기에 사람의 눈으로 꽃의 행동양식을 평가할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벌·나비가 오직 꽃에 있는 꿀에만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지 모르지만, 벌·나비가 꽃의 생김새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안목이 사람의 그것을 능가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웬만한 생김새로는 꽃은 벌·나비의 관심을 얻을 수 없고, 그 결과 대를 잇지 못할 것이다. 꽃이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생김새를 가져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까지 매혹적인 향기를 품어야 하는 것인지 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을 접고자 한다. 다만 꽃이 보여주는 ‘有餘’의 미덕을 찬양하고자 한다. 꽃은 확실히 넉넉한 의지를 가진 존재이다. 벌·나비는 물론 사람까지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그 정도 수준의 ‘有餘’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 이리 재고 저리 잰 다음 필요한 만큼만 준비하는 것을 속세에서는 지혜롭다고 평가한다. 모든 상황이 예측한대로 맞아 떨어지면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한 치의 남음도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모습에서 우리는 합리성을 본다. 그러나 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꽃의 ‘有餘’는 하나의 감동이다.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아주 쉽게 해내기 때문이다. 꽃의 ‘有餘’에 대한 벌·나비의 대응은 또 어떠한가? 벌·나비는 꽃에 날아들어 자신이 원하던 꿀과 꽃가루를 얻는다. 보통 속세에서는 누가 무엇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을 잃어 득과 실을 합하면 ‘영’(zero)이 되는 경우가 많다. 소위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그러나 꽃과 벌·나비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벌·나비는 꽃 속에서 꿀과 꽃가루를 캐내지만 결코 꽃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 덕택에 꽃은 열매가 되고 그 열매가 다시 꽃을 피워 벌·나비에게 귀한 먹이를 준다. 이와 같은 선순환은 꽃의 ‘有餘’에 대하여 벌·나비가 ‘節制’로 응답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무방비로 활짝 개방된 꽃 속에서 벌·나비가 보여준 ‘節制’도 하나의 감동이다.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그러한 상황에서 대개 탐욕이 정당화되고 약탈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딜레마를 꽃과 벌·나비는 ‘有餘’와 ‘節制’의 미덕으로 넘어서고 있다.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꽃과 벌·나비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다.

[2008.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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