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라면과 합죽선

March 22, 2010

라면과 합죽선

명순구

 


  1993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당시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던 나는 평소 아는 분으로부터 국제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주대학교에 계시는 교수님 한 분이 파리를 방문하시는데 안내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시절의 파리 유학생에게 이와 같은 종류의 전화는 꽤 흔한 일이었다. 그 분으로부터 파리에 도착하셨다는 전화가 있어 약속 장소를 정하여 그 곳으로 갔다. 이병훈 교수님을 처음으로 뵙고 알게 된 것이 그 때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이 교수님의 연세가 현재의 내 나이 정도이셨던 것 같다.  

  파리 시내의 명소 몇 군데를 같이 돌아보며 담소를 나누었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참으로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교수님의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로 나가면서 나는 약간 부담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박사학위논문 작업이 한창이어서 시간에 쫓기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교수님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금방 마음이 달라졌다. 내가 따스한 배려 속에 있다는 느낌을 깊게 받았기 때문이다. 왠지 모를 막연한 불안감을 깔고 사는 유학생활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편안함이었다. 저녁 시간이 되었다. 이 교수님께서는 비싸고 맛있는 것을 말하라시며 무엇이 먹고 싶냐 물으셨다. 약간의 고민 끝에 내가 다니던 대학 근처에 야끼도리 요리를 하는 일본식당에 들어갔다. 유학생의 경제력으로는 잘 갈 수 없는 식당에서 즐겁게 식사를 했다. 

  헤어질 즈음에 이르러 이 교수님께서는 배낭을 여시더니 그곳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하셨다. 라면이었다. 그것도 한 종류가 아니었다. 지금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 매우 다양한 종류의 라면으로 약 10개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주시는데 그것은 전주 특산 합죽선(合竹扇)이었다. 그 물건들을 모두 빼고 나니 배낭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렸다. 그 더운 여름에 내게 건네줄 물건을 메고 하루 종일 파리를 누비셨던 것이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 말로는 분명히 모자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귀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동안 잔잔한 행복감이 가슴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은 좀처럼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파리에서 한국 라면을 구입하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 그리고 가격도 한국에 비하여 호되게 비싸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만해도 사정이 달랐다. 당시 한국 라면은 파리에서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라면 10개의 부피는 상당하다. 그런데 그것을 한국에서부터 가져오신 것이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더욱 감동스러웠던 것은 라면의 종류가 한 가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이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는지 알 수 없어서 여러 종류를 준비하신 것 같았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배려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라면이 거기서거기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한 종류의 라면으로 준비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여러 종류의 라면이 그렇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느꼈다.   

  합죽선은 프랑스의 지도교수님께 선물을 하라는 말씀과 함께 건네주신 물건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지도교수님께 전화를 할 일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 부채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제안에 대한 지도교수님의 반응은 나를 꽤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지금은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시기인데 그런 때에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부적절하므로 사양한다는 말씀이셨다. 백번 옳으신 말씀이기는 하나 부채 정도는 허용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은 채 머쓱해진 제안을 거둬들여야 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나 학위논문이 통과된 후 지도교수님께서 댁으로 저녁 식사 초대를 해주셨다. 그 자리에 문제의 합죽선을 가지고 갔다. 나는 웃으면서 “이제는 논문지도가 끝났으니 그 때 말씀드렸던 이 부채를 받아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역시 활짝 웃으시면서 부채를 받아주셨다. 

  합죽선을 펴서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감탄과 함께 부채 얘기를 계속하셨다. 지도교수님께서는 한국에서는 부채를 어디에 사용하느냐고 물으셨다. 다소 어이없는 질문에 나는 말없이 웃음으로 응답했다. 그러자 지도교수님께서는 과거 프랑스에서는 부채가 바람을 일으키는 용도라기보다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대할 때에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말씀과 함께 프랑스의 신분제도에 대하여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얘기를 들려주셨다. 프랑스에서 부채는 신분적 계급사회의 표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역사 문제로 화제를 바꾸셨다. 나의 학위논문을 지도하면서 관심이 생겨 한국 역사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었다는 말씀과 함께 과거제도를 언급하셨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를 보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미 14세기에 신분이 아닌 공정한 시험제도를 통하여 인재를 선발하여 국가를 경영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기 프랑스에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지도교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문화전통이 한국의 사회·경제발전의 밑거름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세계최고의 문화요소를 실감하였다. 그리고 지도교수님께서는 앞으로 한국에 돌아가 학문을 함에 있어서 부채는 더울 때 바람을 일으키고자 할 때 쓸 것이지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는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 모두가 이병훈 교수님께서 주신 합죽선이 계기가 된 귀한 대화의 순간이었다. 

  이병훈 교수님께서 영광스런 정년을 맞이하신다고 한다. 그렇게 따스한 가슴으로 연구를 하시고 제자를 길러내셨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우시다. 

 


천잠벌삼십년(소헌 이병훈 교수 정년기념문집), 2010, 220~222면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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