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뭇잎은 스스로 지지 않는다
나뭇잎은 스스로 지지 않는다 명순구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겨울방학이 되어 할아버지·할머니가 계신 고향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직행버스로 서울에서 늦게 출발한 탓에 밤이 늦어서야 종점인 읍내에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막차가 이미 끊어진 터라 걸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짧지 않은 거리 중에서 약 2㎞는 그야말로 산길이었다. 그 산길을 홀로 걸으며 오싹오싹 무서웠던 기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주 깜깜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면 덜 무서웠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때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희미한 별빛이 하얗게 쌓인 눈에 반사되어 만들어내는 조명이 나무들을 무서운 모습으로 만들었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채 참나무와 도토리나무 따위에 달려있는 마른 잎들 또한 바람에 서로 부딪치며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 때에는 별빛이 야속했다. 한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은 채 너저분하게 흔들거리는 참나무와 도토리나무의 잎들도 미웠다. 쉰 살이 된 지금도 그 산길을 간다면 그렇게 무서울까? 약간 무섭기는 하겠지만 옛날 같은 정도는 아닐 것 같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겹겹이 쌓인 경험으로 인해 별빛이 만들어 낸 모습은 허상에 불과하고, 또한 잎은 그저 잎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는 악도리 같은 마음도 무서움을 떨치는데 한 몫을 할 것이다. 내 중학생 시절 한밤중에 산길에서 참나무와 도토리나무 잎들이 바람에 사각거리던 소리가 지금 생각해도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 왜 그들은 한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참나무와 도토리나무가 스스로 잎들을 떨어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낙엽수에 있어서 낙엽은 제 스스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나무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잎을 떨쳐내고, 어떤 나무는 잎들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그대로 부여잡고 있다가 세찬 바람을 맞고서야 잎을 버린다. 단풍나무나 은행나무는 가을이 되면 떨켜라는 특별한 세포층을 만들어 수분과 양분이 잎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겨울을 난다. 이들 나무에게는 자신의 의지로 잎을 버리는 단호함이 있다. 이와 달리 참나무와 도토리나무는 떨켜를 만들지 않고 남이 잎을 떨어뜨려 주기를 기다린다. 이들 두 부류 나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진화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왕 버릴 바에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 같다. 겨울비가 흠뻑 젖어 건들거리는 가랑잎은 처량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세상의 나뭇잎 중에서 제 의지에 따라 스스로 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네 사람은 제 의지대로 살고 있나?
[20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