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크림슨(crimson)을 아시나요?
[수필] 크림슨(crimson)을 아시나요? 명순구
고려대학교의 색깔, 즉 교색(校色)은 크림슨(crimson)입니다. 화가들은 보통 크림슨 레이크(crimson lake)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크림슨은 빨간 색에 파란 색이 섞여 약간 차가운 느낌을 주는 붉은 색입니다. 크림슨이 고려대학교의 색깔이 된 것은 1955년 5월 5일 개교 50주년 행사의 하나로 고려대학교 교기를 제정하면서부터입니다. 그 전에도 교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종전에는 보성전문학교 교기 위에다 글자만 고려대학교로 바꾼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유진오 총장은 1952년부터 1953년에 걸쳐 선진 각국의 대학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새로운 교기의 필요성을 느껴 교기 제정을 개교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때 유진오 총장이 직접 디자인하여 제정된 교기는 지금까지 고려대학교 교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교기는 폭 63cm, 길이 90cm의 바탕에 폭 23cm, 길이 30cm의 방패형 문장을 그려넣은 것인데 그 바탕색이 바로 크림슨입니다. 1955년 교기 제정을 계기로 크림슨은 고려대학교의 색이 되었습니다. 유진오 총장은 크림슨을 교색으로 채택한 배경에 대하여 “나는 내가 1년 동안 연구원으로 있던 하바드 대학의 교색과 같은 진홍색(crimson)을 교색으로 채택하였는데, 그것은 결코 하바드 대학을 맹종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선수복장이나 응원기 등에 관용해 오던 붉은 색을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이었다.”(유진오 저『養虎記』, 285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려대학교는 붉은 색을 널리 사용해 왔는데, 개교 50주년을 계기로 여러 붉은 색 가운데 크림슨을 학교 표준색으로 확정한 것입니다. 크림슨이 어떤 색이기에 유진오 총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일까요? 아주 오래 전부터 크림슨은 유럽에서 우아함과 품격의 상징으로 여겨졌는데 그 배경이 제법 흥미롭습니다. 크림슨을 얻기 위한 염료는 코치닐(cochineal)이라는 곤충을 원료로 한답니다. 코치닐은 중남미 지역에서 자라는 노팔 선인장(nopal cactus)을 먹고 산답니다. 원래 코치닐은 중남미 아메리카 주민들이 개발한 염료로서 면을 비롯한 직물에 색깔을 입히는 데에 쓰였답니다. 아메리카에 양이 들어오고 모직물 생산이 시작되면서부터 코치닐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답니다. 코치닐 염료는 종전의 면보다 모직물에 더 짙게 색이 들기 때문이었다지요. 그런데 이 염료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답니다. 염료 1Kg을 얻기 위해서는 코치닐 16만 마리가 필요할 정도였다니까요. 게다가 최고급의 코치닐 염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한 번도 교미를 하지 않은 암컷만을 원료로 해야 하는 등 일손도 많이 가는 물품이었답니다. 코치닐 염료는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이 한창이던 16세기에 유럽에 알려졌는데, 코치닐은 에스파냐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점령하고 난 후 에스파냐로 보낸 값비싸고 신비스러운 염료였답니다. 유럽에서 코치닐 염료는 최고급 염료로서 왕·귀족·사제의 의상이라든가 회화, 태피스트리 등에 붉은 색을 입힐 때에 사용되었답니다. 아메리카에서 수입을 해야만 볼 수 있는 색깔이니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색이 아니었지요. 고려대학교의 교색 크림슨은 우아함과 품격을 품고 있습니다. 개교 50주년 되는 해에 교색으로 제정된 크림슨, 그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2012년, 고려대학교는 개교 107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역사는 인식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고려대학교 교색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올 여름 혹시 중남미 여행을 할 기회가 있거든 코치닐 농장에 들러 보는 것은 어떨지요. 그 곳에서 천연 색소로 물들인 크림슨 색깔 옷도 한 벌 사서 입어 보아요. 요즘 대부분의 크림슨은 화학적인 방법으로 제조한 인공색소를 사용해 색깔을 낸 것입니다. 대체로 인공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에 비해 품격이 덜하지요.
[2012. 5. 5]
P.S. (2012/06/03): 2011년 9월 1일부터 교무처장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 행정을 하다보니 "우리 학교가 좀 더 좋아졌으면..."하는 고민을 많이 하게 되네요. 위 글도 그런 마음에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