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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1955년 5월 5일 안암 대향연

1955년 5월 5일 안암 대향연

명순구(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55년 5월 5일, 하늘은 맑게 개고 철쭉꽃이 교정을 붉게 장식한 가운데 고려대학교 창립 50주년 기념식은 성대하게 거행되고, 그날 저녁에는 중앙도서관 대열람실에서 내빈, 교직원, 교우 수백 명이 모여 대향연이 열렸다. 고려대학교가 발족한 이래 처음 가지는 성사요, 오래간만에 맞아보는 희망과 광명의 하루였다.”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가 지은 『養虎記』(양호기)의 구절이다. 1955년 총장으로서(1952~1965 총장) 고려대학교 개교 50주년 행사를 주도한 현민의 감동어린 소감이다.

2015년은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을사조약 110주년, 해방 70주년, UN 창설 70주면, 한일협정 조인 50주년 등 굵직한 사건들이 10년으로 딱 떨어지는 해이다. 개교 110주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 서거 60주기를 맞는 고려대학교에게도 2015년은 각별하다.

며칠 전 연구실 창밖으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책 하나가 떠올랐다. 『養虎記』(“호랑이를 키운 기록”), 그 이름만으로도 高大스럽다. 아주 오래 전에 읽고 책장 깊숙이 숨어있던 책을 꺼내들었다. 이 책에서 현민은 34년(1932~1966)에 걸친 고려대학교의 생활을 회고한다. 문학가답게 문장도 깔끔하다.

현민이 고려대와 인연을 맺은 1932년은 인촌이 보성전문학교의 경영을 인수한 때이다. 인촌은 현민을 보성전문의 간판 감으로 여겨 영입 제안을 했다. 이에 현민은 “도서관을 지을 것”, “교수마다 연구실을 줄 것”, “연구논문집을 간행할 것”의 세 조건을 내세웠다. 전문학교가 아닌 대학의 조건을 말한 것이다. 민족·민립 대학(大學)을 꿈꾸던 인촌에게 이들 조건은 장애물이 될 게 없었다. 인촌은 모든 조건을 즉석에서 수락했고, 27세의 청년 유진오는 보성전문 법과에서 헌법, 행정법, 국제법 강의를 시작했다. 『養虎記』에서 현민은 이 부분을 ‘결연’(結緣)이라고 적고 있다.

학교 인수 직후부터 인촌은 안암동 일대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구입하고 그 중앙에 돌집을 짓기 시작했다. 1933년 착공하여 1934년에 완공된 본관이다. 현민은 본관을 총독부 외에는 유례가 없는 초호화판 건물로 회상한다. 일제 압제에서 왜 그리 호사스런 건물이었을까? “그것은 오기요, 반항이요, 겨레에 대한 격려”라고 적고 있다. 1934년 9월 28일 종로 송현동의 아담한 교사에서 안암의 광야로 “전교직원, 학생이...안암동을 향해 도보로 열지어 행진하였다. 하늘은 맑게 개고 길가는 사람들은...우리의 행렬을 축복해 주었다.”

『養虎記』의 백미는 개교 50주년 행사 회고이다. 50주년을 계기로 현민은 고려대학교를 대학다운 대학으로 만들고자 했다. 현민의 대학관은 명확했다. “진정한 의미의 대학과 이름만의 대학은 자유의 정신이 살아 있느냐 없느냐에 의하여 구별되는 것입니다.” 고려대학교의 역사적 정체성에도 유의하여 고려대학교의 전통을 이용익-손병희-김성수로 정립했다. 50주년 기념 학술논문집을 간행하여 고려대학교의 학문을 당당하게 자랑했다. 일제치하의 것이라 반항으로 일관된 구 교가 대신에 세련된 시어와 우아한 곡조의 교가를 새로 만들었다. 조지훈에게 작사를 의뢰하면서 ‘자유·정의·진리’와 ‘마음의 고향’은 꼭 넣어라 했고, 신진 윤이상에게 곡을 붙이도록 했다. 교색은 크림슨으로, 학교 상징동물은 호랑이로 정했다. 교기도 새로 만들었다. 단과대학과 기구의 전면 개편, 학칙의 전면 개정, 교원임용규정 제정 등 주요 제도가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고려대학교 현대화의 출발점이었다.

개교 50주년 기념행사, 면밀한 계획으로 고려대학교의 미래를 기약하는 사건이었다. 현민은 그 감격을 “맑은 하늘, 붉은 철쭉꽃”으로 요약했다. 그래서 해마다 5월 안암 동산은 붉은 철쭉으로 눈이 부시다.

<2015년 10월 고대신문 "교수의 서재"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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