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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고려대학교 민사법학회 학회지 탑되리 격려사(2002년)

격 려 사 - 도시의 감나무에서 紅枾를 본다는 것 - 명 순 구 교수(민사법학회 지도교수)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졌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풀과 나무는 모두 가을의 모습과 냄새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가을을 맞이하는 동안 고려대학교 민사법학회도 좀 더 성숙하였습니다. 민사법학회의 학회지 '탑되리'가 올해로 여덟 번째를 맞고 있습니다. 감나무 이야기를 통하여 민사법학회 회원 여러분들에게 축하와 아울러 격려의 인사를 전하고자 합니다. 감나무는 열대·아열대 및 온대 지방에 매우 넓게 분포하는 식물로 그 종류가 거의 200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열대와 아열대 지방에 분포된 감나무는 이용 가치가 거의 없고 과실로서 재배 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가 한국·중국·일본에 분포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의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로 감나무를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 같습니다. 감나무는 일곱 가지 덕이 있다 하여 예전부터 예찬을 받아온 나무입니다. 일곱 가지 덕이란 이런 것입니다. 수명이 길고, 그늘이 짙으며, 새가 둥지를 틀지 않고, 벌레가 생기지 않으며, 가을에 단풍이 아름답고, 열매가 맛이 있으며, 낙엽이 훌륭한 거름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나무는 文·武·忠·節·孝의 다섯 덕목을 갖춘 나무로 칭송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잎이 넓어서 글씨 연습을 하기에 좋다는 이유에서 文이 있고, 나무가 단단하여 화살촉으로 쓰인다는 이유에서 武가 있으며, 열매의 겉과 속이 같은 색으로 표리가 동일하므로 忠이 있고,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까지 열매가 가지에 달려 있으므로 節이 있고, 치아가 없는 노인도 홍시를 먹을 수 있어서 孝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감나무는 黑·靑·黃·紅·白의 五色을 갖춘 나무로 예찬받기도 합니다. 나무 심재는 까맣고, 잎은 푸르며, 꽃은 노랗고, 열매는 붉으며, 곶감에서는 하얀 가루가 나온다는 이유입니다. 가을이 깊어질 대로 깊어지면 감나무 가지에 감이 흠뻑 익어 紅枾가 됩니다. 지금과 같은 늦은 가을, 시골 마을에 있는 감나무에는 홍시도 달려있고 홍시로 향하고 있는 감도 달려있습니다. 그런 감나무 밑에서 친근한 사람과 같이 홍시를 찾아가며 그 맛을 즐기는 모습은 여유롭고 따스합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이와 같은 기회를 가진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도시의 감나무에는 감이 전혀 열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도시의 감나무에 열린 감은 모두 어느 한 순간에 동시에 홍시로 되기 때문일까요? 도시의 감나무 가지에 열린 감은 공해에 찌들어 식용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그 원인은 아주 다른 곳에 있습니다. 도시의 공원에 가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케 하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공원에 온 사람들 중에서는 아직 익지도 않은 감을 따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주 태연하게 도둑질을 하는 셈이지요. 이와 같은 연유로 하여 도시의 감나무에 열린 감은 홍시가 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으며, 그 결과 도시에서는 홍시를 보기가 어렵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도시의 감나무가 오로지 홍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홍시를 볼 수 없다고 하여 그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나 도시의 감나무에서 홍시를 거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이를 그냥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생명체로서의 감나무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감나무는 생명체인데, 생명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모습이 굴절없이 반영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감이 채 익기도 전에 모두 따버리는 행위는 감나무가 자신의 생명력을 한껏 발휘하여 자신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입니다. 생명체에게 생명체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또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둘째, 감이 채 익기도 전에 따는 행위 자체의 非道德性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자기의 것이 아닌 감나무에서 무단으로 감을 따는 행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감이 익도록 놓아두었다가 혹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 그 달콤한 감이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감을 땄다면 이는 더 나쁜 행위입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라는 못된 심보와 다를 것이 없는 행동입니다. 도시의 감나무에서도 紅枾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되기 위해서는 생명체들끼리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굳은 의지와 여유도 필요할 것입니다. '탑되리'의 만 여덟 번째 생일입니다. 앞에서 얘기한 감나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의 생활과 학문에 대하여 한 번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민사법학회의 학회지가 여느 학회지와 다른 점은 난잡한 광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이 책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 전적인 후원을 해주신 서울보증보험의 김용덕 상무님(법학과 73학번) 덕택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김 상무님의 후배사랑과 애교심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탑되리' 제8호의 발간을 축하하며 민사법학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따스하고 애정어린 격려를 보냅니다. 내년 늦가을 안암동산에서 紅枾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2002. 10. 25. 명 순 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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