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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굳세어라 은행나무

굳세어라 은행나무

명 순 구 (고려대 법대 교수)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 밑에 잘려진 생가지와 찢겨진 잎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누군가 은행나무를 유린한 흔적이 분명하였다. 서너 그루 당 한 나무 정도의 비율로 비슷하게 욕을 당한 상태였다. 이것은 매년 가을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기 직전의 시기에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며칠 후 그 곳에서 사정을 짐작케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어떤 남자가 두 손으로 은행나무를 잡고 마구 흔들어대기도 하고 각목으로 은행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무차별적으로 난타하기도 하면서 땅에 떨어진 은행을 줍고 있었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은행나무를 보면 ‘대단한 나무’, ‘고마운 나무’, ‘재미있는 나무’ 등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잎의 생김새와는 달리 식물분류상 침엽수에 속한다는 사실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나무이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귀중한 약재로 쓰이기도 하는 나무이다. 열매가 살구(杏)를 닮았는데 은빛을 띠고 있다 하여 은행(銀杏), 잎이 오리발을 닮았다 하여 압각수(鴨脚樹), 은행나무를 심으면 손자 대에 가서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 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하는 나무이다. 빨간 단풍나무와 함께 맑은 햇살 아래 노란 색깔로 가을을 장식하는 나무이다. 이런 은행나무를 무자비하게 학대하고 있는 장면은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은행나무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면 그 나무에서 자연스럽게 떨어진 은행을 줍는 것도 잘못된 일이거늘, 나무를 상하게 하면서까지 은행을 터는 모습은 정말이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미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수난의 대상은 은행나무 중에서도 암나무라는 사실이 더 안타까웠다.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는 은행나무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암나무인데, 그러고 보면 암나무는 사람에게 이로운 열매를 제공하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수난을 당한다는 억울한 상황의 희생자이다. 생각이 이 정도에까지 이르고 보니 열매를 달고 있는 은행나무에 대한 마음은 안타까움에서 미안함으로 바뀌고 만다. 그를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런 내 마음을 은행나무에게 전해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큰 걱정을 하지는 않으려 한다. 노란 빛으로 가을 단장을 하기도 전에 잎이 찢기고 가지가 잘라지고 무지막지한 각목으로 줄기에 상처를 입었다는 정도의 사유를 들어 생명활동을 포기하는 은행나무를 본 적은 없다. 자신에게 이상한 짓을 한 것을 괘씸히 여겨 다음 해에 열매를 주지 않는 은행나무를 본 적도 없다. 은행나무는 굳건한 기상을 가진 나무이다. 그러니 공룡이 살던 시대부터 지금까지 생명을 이어와 ‘화석나무’로 불리는 것일 게다. 은행나무과에는 오직 은행나무 한 종만이 존재하여 외로움을 품고 살지만 이 나무는 그렇게 충실한 세상의 한 식구로 늘 건재하다. 오늘도 한 사람이 은행나무를 유린하고 있다.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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