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서언] <민법총론>,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머리말
고려대학교 설립 110주년을 맞아 “1905” 시리즈를 창설하면서 그 첫 권으로 1955년 고려대학교, 법과 시와 음악을 출간한 것이 2015년의 일이다. “1905” 시리즈는 고려대학교와 한국 근대사에 관한 다양한 사유의 결과를 담아내기 위한 책이다. 이번에 출간하는 “1905” 제2권에는 20세기 초 보성전문 시대의 교과서 번역 사업의 결과들을 담고자 한다.
1905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두 개의 학과(법률학전문과, 이재학전문과)로 개교했으니, 번역 대상인 교과서들은 우리나라 법학 및 경제․경영학 분야의 초기 체계서라고 할 수 있다. 1905년 즈음 위 학문을 전수하는 교육기관으로서 보성전문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설립된 고등교육기관 중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온 것은 보성전문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20세기 초 출간된 교과서 번역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교육기관은 보성전문의 후신인 고려대학교이다. 대한민국의 학문사에서 보성전문과 고려대학교가 가지는 위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1905년이라는 시기는 우리 국가와 민족이 자존심을 짓밟혀가며 매우 고단하게 역사를 이어가던 시기이다. 아울러 우리나라에 자의․타의로 근대 학문이 밀물처럼 밀려든 시기이기도 하다. 그 격동의 시기에 설립된 보성전문은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갈 일꾼들을 길러내기 위하여 근대적 실용학문을 본격적․체계적으로 교수한 고등교육기관이다. 그러므로 보성전문에서 시행된 교육과 연구는 대한민국의 학문사(學問史)에 진한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이다. 이와 같이 보성전문의 교과서는 우리나라 근대 학문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많은 한자어, 언문일치가 되지 않은 문장 스타일, 종서 형식의 인쇄 등으로 인해 요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보성전문 교과서 번역 사업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과 귀한 자료를 공유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학칙」에 해당하는 「私立普成專門學校規則」(1905) 제5조가 “일반교과서는 각 담임강사가 편술한 것을 출판·교수하되 이를 ‘강의록’이라 부를 것”이라고 규정한다든가, 제24조가 “재학생은 결석 여부를 불문하고 매월 5일 이내에 학비금 1원을 본교에 납입할 것. 다만 때에 따라 강의록대금으로 바꾸어 부르되 그 금액은 수시 산정할 것”이라고 규정한 것을 보면, 각 교과목마다 교과서를 구비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교과서를 준비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는 1996년 윤서석(尹瑞石) 선생께서 기부해 주신 보성전문의 교과서 및 교재 약 30권이 희귀본으로 분류되어 보관되어 있다.
보성전문 교과서 번역 사업의 문을 여는 “1905” 제2․1권은 법학교과서인 民法總論이다. 대부분의 보성전문 교과서가 그러하듯 民法總論에도 저자가 신우선(申佑善)이라는 것 외에는 출판연도․출판사 등 다른 출판사항에 대한 기록이 붙어있지 않다. 저자 신우선은 보성전문 창립기의 강사 14명 중 한 사람이다. 이 책은 총 260면으로 되어있으나, 책의 체계상 그 뒤에 상당량의 서술(법률행위의 부관 중 조건 뒷부분과 기한, 기간, 시효)이 더 있어야 한다. 아쉽게도 책의 끝부분이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가 밝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1898년부터 시행된 일본민법전을 기준으로 한 교과서이다. 그런데 현행 대한민국 「민법」(1958 제정, 1960 시행)이 큰 틀에서는 일본민법전을 대폭 참고한 것이어서 대체적인 체계와 내용은 지금 보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한편, 구체적인 용어에 있어서는 당시 일본법의 용례에 따르다보니 현행 민법과 차이가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체로 우리나라 법학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현재 한국의 법률용어로 변경했다. 또한, 원문에는 매우 긴 문장이 많다. 당시의 일반적 서술 방식에 따른 것인데, 이는 요즘 사람들의 눈에 익숙하지 않다. 그리하여 긴 문장으로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경우에는 해당 문장을 끊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다. 경우에 따라 역자주를 추가한 것도 또한 독자들의 편의를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책의 구성은 왼쪽 면에 원문을, 오른쪽 면에는 그에 해당하는 번역문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하였다. 책 표지는 가급적 원 자료의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다. 한지의 색감을 유지하면서 실로 묶는 방식으로 제본한 모습을 표현하였고, 제목의 글자도 원 자료의 글자를 그대로 재현했다.
이번에 발간하는 “1905” 제2․1권을 시작으로 제2․2권, 제2․3권... 이렇게 보성전문 교과서 번역 사업이 빠른 시일 안에 완료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한 선결과제는 보성전문 교과서를 빠짐없이 수집하는 일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것은 보성전문 교과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번역서의 출간이 보성전문 교과서 수집 운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보성전문 교과서 번역 사업은 단순히 고려대학교 역사 찾기의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이 사업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법학․경제학․경영학의 초기 모습을 정확히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보성전문 교과서 번역 사업이 성숙 단계에 이르면 저자에 관한 연구, 교과서의 계보에 관한 연구 등 심도있는 후속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업은 대한민국 학문사의 시계바늘을 지금보다 훨씬 뒤로 돌려 학문 수준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번역서가 나오기까지 여러 분들이 도움을 주셨다. 우선 파안 명위진 회장님께서는 귀한 기부로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파안연구기금을 조성해 주셨다. 그리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교우회 전병현 회장님께서는 이 책의 구매 약정을 통해 귀한 도움을 주셨다. 두 분의 재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이 사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 사업성과 무관하게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해 주신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의 이재학 원장님, 정성스럽게 편집 작업을 수행해 주신 유재혁 선생님, 원문의 활용을 위하여 기꺼이 행정적 수고를 베풀어 주신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구자훈 선생님과 한민섭 선생님, 스캔과 번역 작업에 큰 힘이 되어 준 박덕봉 법학석사와 김한빈 법학석사, 이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역사는 자기 정체성 인식의 출발점이다. 역사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기억하며 가꾸는 사람들의 것이다. 고려대학교 교우회 110주년을 맞는 2017년에 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이 고려대학교의 역사를 넘어 대한민국의 학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영광은 없을 것이다.
2017년 2월
옮긴이 명 순 구